기념일을 잘 챙기지 못한다.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보다 일상을 특별하게 보내는 것이 낫다는 낭만없는 자기변명일 수 있다.그러던 중, 올해꼭 챙기고 싶은기념일이 생겼다.반 아이들의 고3 100일 기념일. 힘든 수험 생활을 꾹꾹 눌러 담은 시간들에 대한 격려를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공부를 열심히 하든, 그렇지 않든 고3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주는 무게감은 만만치 않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수능을 150여 일앞두고한 발자국씩 앞당겨지는 거대한 시험에 대한 압박감은 날로 날로 커진다. 6월 모의고사를 치르고 가뜩이나 쪼그라든 자신감에 살짝이라도 다림질해 주고 싶다.앞으로 올 날에 대한 숫자 계산이 아닌, 지나온 날에 대한 발자취를 세어 보고 100이라는 숫자를 토닥여 주려는 마음이다.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겐 격려를,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자극과 응원이 되리라 믿으며.
"100일 파티하는 날은, 조퇴도 결석도 절대 안 돼!"
질병 조퇴와 결석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틈틈이 이가 빠진 듯 교실이 듬성한 경우가 다반사다. 이날만큼은 한 명도 격려와 토닥임에서 열외 되지 않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아이들 모두가 전원 출석이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닌지라우선, 칭찬 세례를 퍼붓는다.
허술한 담임 같으니라고. 100일 초를 샀는데 불을 못 챙겼다. 점심시간에 믿음이 가는 행사 담당자에게 뒷수습을 떠넘겼다.
"OO야, 이거 케이크처럼 세팅하려고 샀는데 성냥을 깜빡했다. 어쩌지? 해결 좀 해봐."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놀랍다. 5교시가 시작되어 교실에 들어갔더니 쪼로로 달려와 자랑스럽게 말한다.
"선생님, 제가 불 찾으러 학교 안을 돌아다녔는데 복도에 라이터가 운명처럼 떨어져 있더라고요!"
아이들은 '진짜 주운 거야? 평소에 가지고 있던 거 아니고?' 하며 농담을 건넨다. 하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놀랍다. 불을 밝히고 노래를 부르며 100일 파티에 막을 올렸다.
"선생님, 몽쉘이 다 녹았어요."
아뿔싸, 며칠 전에 사서 트렁크에 두었더니 녹고 식고를 반복했나 보다. 냉동실에 넣어 둔다는 것을 깜빡한 담임 불찰이다. 진짜 난 왜 이럴까. 그래도 아이들은 맛있게 먹는다. 남은 걸 더 먹겠다고 손까지 들고 남김없이 모두 뱃속으로 흡입한다.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책갈피에 좋은 문구들을 출력해서 붙이고, 맛있는 간식을 하나하나 낱개 포장해서 28개를 만들었다. 학생들과 함께 100일을 걸어준 학년부 12명의 선생님들 몫까지 총 40개. 늙었나 보다. 포장하는데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짜잔~오픈했을 때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라 하는 걸 보니 모든 노고가 사그라든다. 노파심에 더해 생색 좀 내려고 한마디 했다.
"얘들아, 이거 진짜 정성 많이 들어간 거야. 교실 바닥에 책갈피 버려져 있거나 떨어져 있는 거 보는 순간 선생님은 폭발할 예정이다."
안나진 선생님의 <이토록 아이들이 반짝이는 순간> 책을 읽다가 아이디어를 얻어서 "우리 반 라디오"를 준비했다. 음악 신청곡을 사연과 함께 보내면 행사날 틀어주는 것! 우리 반 DJ가 시작 음악을 틀어주고 신청곡 몇 개를 들려준다. 온라인으로 신청을 받았는데 다음부터는 참여도를 높이고 아날로그 감성을 살리기 위해 신청 양식을 출력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트로를 끝내고 선물 교환식으로 넘어간다.교탁에 쌓아둔 선물을 보니 전반적으로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이가 있다. 예쁘게 포장지를 두른 선물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선물. 그렇게 선물 포장하라고 일렀건만 아들의 청력 수준은 슬프게도 평균 수준, 기대 이하다. 선물을 받게 될 누군가에게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5천 원 미만의 선물을 준비하도록 2주 전부터 거의 매일 반복 숙지시켰다. 그런데도 준비 안 한 녀석, 이번에도 아들이다. 스스로 민망해하며 다음 주 월요일까지 선물을 못 받은 아이들에게 전달할 것을 약속한다. 나도 아이들 사이에 끼어 선물 교환식을 한다. 책과 간식을 포장했다.
"선생님, 선물 5천 원 미만이라고 했잖아요!"
장난 섞인 핀잔을 받았지만 '나 이미 5천 원 넘게 썼으니까 봐줘.' 하며 주고 싶은 마음을 들이민다. 학생에게 받은 선물도 챙긴다. 맛있는 과자 세 봉지, 집에 있는 아들이 좋아하겠다.
선물 교환식이 끝나고 우리 반 설문 조사 공개! 초집중, 재미 가득의 시간이다. 14개의 질문이 담긴 설문지에는 '가장 먼저 결혼할 것 같은 친구는?'과 같은 미래 예측 가상 시나리오들이 담겨있다. 결과지를 펼칠 때마다 웃고 떠들며 난리가 났다. 담임에게는 아이들의 현재 모습과 친구들 사이의 역학, 저마다의 생각들을 읽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였고 아이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재미가 더해진 시간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호응도와 흥미도가 높았던 코너였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응원 메시지 공개 시간. 수험 생활 100일을 걸어온 자녀에게 격려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학부모님들께 문자를 보내 둔 터였다. 모든 아이가 받을 수 있도록 하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부분이 좀 아쉽다.문자를 스팸으로 아셨거나, 바쁜 와중에 깜빡하셨거나 상황에 대한 이해를 시키는 것이 선행되었다. 설문지를 타고 날아온 엄마의 응원 메시지. 누구의 엄마일까? 읽어 주었더니 당사자는 모르고, 우리 엄마라며 손드는 녀석들. 평소에도 동일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짧지만 뭉클한 메시지에 아이들은 당사자를 밝힐 때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공개를 안 하려 했는데 알려달라고 난리라 어쩔 수 없었다)
고3의 특수성 때문에 학생 참여형 행사 준비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교사 혼자 지지고 볶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메마른 고3의 인생 바닥에 응원 내지는 추억이라는 단비를 살짝이라도 뿌려주었다면 그것으로 족한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수능 150일 전이다. 교문을 들어서면 카운트 다운되는 숫자의 변화를 느꼈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올 것 같지 않던 고3이 왔고, 올 것같지 않던 수능의 부담에 힘겨워했던 마음도따라온다. 선택 과목이 없던 시절, 모든 교과를 공부해야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현재공부량을 논하지 말라고 한다지만, 요즘 아이들이 안힘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번데기 시절을 뛰어넘을 시간 초월의 능력도 없다. 그저 누구나 통과하는 1년을 꿋꿋하게 다 밟고 가는 것이 답이다. 힘들어도 앞으로 살아갈 평생의 근력을 다지는 기간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이 시절을 특징에 맞게 잘 누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