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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Sep 04. 2023

매사를 숙제처럼 해치우는 닦달에서 멈춰 서기

늦깎이 인생원칙 1

그럼에도 한 가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인생을 너무 숙제처럼 해치우듯 살았다는 것이다. 의사로, 엄마로, 며느리로, 딸로 살면서 나는 늘 의무와 책임감에 치여 어떻게든 그 모든 역할을 잘해 내려 애썼다. 나 아니면 모든 게 잘 안 돌아갈 거라는 착각 속에 앞만 보며 달려왔고, 그러다 보니 정작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을 놓쳐 버렸다. 당신은 부디 나처럼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너무 닦달하지 말고, 매사에 너무 심각하지 말고,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中, 김혜남 -

의사이기에 누려왔던 삶을 접고 파킨슨병을 앓는 환자로서 저자가 딱 한 가지로 추려낸 제1의 후회: 과제하듯 무엇이든 해치우는 삶. 인생을 숙제처럼 살면서 자신을 닦달하지 말라고 한다.


누군가가 뼈저리게 후회하는 삶 속에 내가 질척대고 있다니, 순간 뜨끔하다. 그 어렵다는 의사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로 빼곡하게 채워진 삶의 의무를 버티며 이리저리 치였을 것이 뻔하다. 냉정한 현실은 저자에게 보상은커녕 강도 높은 질병을 고(告)했다. 처절한 배신이다. 현실에 대한 ‘포기’와 살고자 하는 ‘오기’를 힘겹게 오가며 저자는 이제, 부디 닦달하지 말고 재밌게 살라는 제안을 건넨다.


아파야 비로소 보이는 명제를 아프기 전에 발견하는 것은 지혜다. 다행히 아직은 건강한 나의 손에 쥐어 주는 진심 어린 각성제다. 다시, 정신을 차린다. 수많은 과업 앞에 방치된 나 자신을 챙기고 누려야 할 현재 삶의 즐거움을 놓치지 말자. 어떠한 삶을 살지 따지고 해석하는 사이에 누릴 수 있었던 삶이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릴 수 있다. 언제나 눈앞에 펼쳐질 삶을, 현재가 아닌 미래를 머릿속에 이리저리 굴려보며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미래보다 현재를 머금는 것이 먼저라며 나를 현실의 바닥에 발붙이게 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저당 잡지 말 것,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지침이다.




머리 싸매고 궁리하지 말고 그냥 경험하고 누리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 몸을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은 채 움직이는 듯한 힘겨운 파킨슨병과 씨름하면서도 덜 아픈 때를 백분 즐기려는 저자에 비하면 나의 일상은 그야말로 호강에 찬 향연이다. 때론,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제쳐두고 그저 좋아서 책 읽기와 글쓰기를 맘껏 감행한다. 멋들어진 일탈이라 명명해 본다. 여기에 커피 한잔까지 곁들이면 천국이 따로 없다.


사실, 돈벌이가 없는 요즘은 커피 한잔의 소비도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누릴 수 없게 될 때 아쉬워 말고 지금을 감사하게 누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커피 한잔의 여유에 지갑을 열던 나의 욕구를 사치라 자책했던 마음도 내려놓는다. 그랬더니 이를 응원이라도 하듯 단돈 1,900원의 1+1 커피 행사가 눈에 띈다. 싼값에 꿈꾸었던 여유를 살 수 있었다.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몸으로 커피를 사서 책을 읽고 글을 쓰다니, 행복하다. 활자를 따라가다 피어나는 사유를 백지에 옮기다 보면 인지적ᐧ정의적 메커니즘이 풀가동되어 충만감도 채워진다. 누가 내 글을 읽어 주지 않더라도 나를 숨통 트이게 하는 글쓰기, 그래서 저자는 12년의 투병 생활 속에서도 다섯 권의 책을 꾸준히 출간했나 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남은 생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저자는‘죽음’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준다.‘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어짐이다.’『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루게릭병을 앓았던 모리 교수의 아포리즘과 유사하다.


소박한 하루는 생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순간을 호흡하며 생의 꿈틀거림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때 서야 비로소 참 행복을 소유할 수 있고, 죽음 후에도 이어질 관계를 만들게 된다. 저자는 죽음이 최종적으로 삶을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연속된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모리 교수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 죽을지 알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의도치 않게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피말리던 긴장감이 안도로 치환되던 날, 감사가 봇물처럼 터졌다.


장장 6개월간 정형외과, 신경외과, 치과, 구강 내과를 돌며 관자놀이 부위의 통증에 대한 원인을 찾던 지진한 여정 덕분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신경외과에서 진료를 받으면서 뇌종양이란 병명과 마주쳤다. 진단을 받은 건 아니지만 ‘가능성’을 염두한 채 검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처방약을 복용한 후에도 진전이 없으면 큰 병원으로 가야 했다. 1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통증이 가라앉지 않자, 앞으로 닥칠지 모를 뇌종양 선고에 대비하며 죽음을 떠올렸다.


순간, 생의 마감이라는 두려움보다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애잔함이 몰려왔다. 대기만성형이라는 남편이 성공하는 것도 보고 싶고, 내 아이가 커가는 것도 보고 싶은데. 내가 누리지 못할 생에 대한 아쉬움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남기고 갈 상처와 슬픔에 가슴이 더 아렸다. 엄마 없이 커가는 아이들에 대한 TV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남겨질 두 남자로 인해 그저 슬펐다. 마지막 구강 내과 진료에서,“에이, 뇌종양은 절대 아니에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얼마나 눈물 나게 고마웠던지.


청년에게 죽음은 먼 이야기다. 삶을 살아 내는 것만으로도 바쁠 노릇이다. 나도 그랬다. 평생 청년의 때에 머물러 있으리라 착각했다. 하지만 이젠 저 멀찍이 남겨진 추억으로 젊은 날을 간직할 뿐이다. 노년에게 죽음은 점차 가까워지는 실체다. 외면하다가도 코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생각하면 생기가 사라지기 쉽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느껴진다. 이에 비해 중년은 생과 죽음을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혜안을 가져야 할 이유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 선 중년의 인생길에서 다시 자문해 본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아니, 질문을 살짝 수정해 보자.

“운이 좋게도 만일 내가 여전히 건강한 몸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적이 허락된다면?”


보다 현실적인 질문 앞에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제 막 발견한 늦깎이 인생의 재미와 의미를 머릿속에 굴려본다.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래, 나는 미래가 아닌 현재를 알차게 살아가련다. 스스로 둘러놓은 테두리 안에 갇혀서 비좁게 치여 사는 인생은 별로다.


현재의 울타리 안에서 넉넉하게 즐기자. 그러다 보면 부산 떨지 않고 조용히 죽음으로 삶을 완성하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맞이할 미래의 모습은 현재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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