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닿는 힘이 있다. 나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마음의 진동과 떨림에 끌려서인지 어려서부터 손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주는 것이 있어 받는 것도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받아온 편지들을 차곡차곡 모아 커다란 상자에 봉인해 두었다. 편지 안에 담긴 마음이 날아갈 새라 꽁꽁 묶어 인생의 황혼기에 하나씩 꺼내보려 아껴두었다.
어느 날 상자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친정집 방을 뒤졌다. 있어야 할 자리에 상자가 없다.눈을 의심했다. 수년간 붙박이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보물이 한순간에사라져 버리다니.찾고 찾았지만 결국 허탕이다. 치매를 앓고 있었던 아버지, 당신이 버린 것은 기억만이 아니었다. 집안에 경계 없이 놓인 물건들이 증발되었다. 나의 추억 상자도예외 없는 희생타였다. 언제 어떻게 자취를 감추었는지 추적조차 불가하다. 아버지의 입에서 원하는 답을 얻을 수도 없었다.그의 지력은이미 다해버렸다. '추억은 추억이 깃든 집에서'라는 고리타분한 낭만에 젖어 상자를가져올까 말까망설였던 수많은 결정장애의 순간들이 뼈저리게한스럽다.그렇게 아끼던 글들이 내 안에도달하지도 못한 채 장렬히 전사했다.일부러 펼쳐보지 않았던 지난날의 편지들이 못내 아쉽다.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의 무너진 마음에서 출발했다. 글쓰기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곤 뚝 떼어낸 '시간'과 변하고 싶은 '간절함' 뿐이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던 나에게 멋들어진 옷 한 벌지어 입혀주고 싶었다. 작정하고 시간과 공을 들였다. 현란한 장비빨 따위필요 없이매일엉덩이의 힘하나면 충분했다.간절함의 지수가 높아서인지 새벽이면 절로 눈이 떠졌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며 머리와 가슴의 반응을 쭉 훑었다.끄적끄적 글쓰기가뒤따라왔다.
바깥에서 서성이며 문을 두드렸던 글이, 꽁꽁 싸매어 있던 내 안의 깊숙한 곳까지 내려갔다. 나라는 존재를 공감해 온 평생의 시간에,지친 자아를 공감하는 빠른 반응 속도까지.두 변수를곱하니 심연 깊이까지 긴 거리가 뚫린다. 글은 그렇게 나도 몰랐던 마음 끝까지내려가구석구석을 훑으며희뿌연연무를 걷어냈다. 닿는 깊이만큼내면의 땅이 정돈되고 넓어졌다. 그 위에 점차 명료하고 단단한 내가 세워졌다.남들은 1도 관심 없고, 나조차 방치해 두었던 나를 돌보며 게워내기와 채우기를 반복한 시간 덕이다.
느지막한 시절에운 좋게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단지 운만은 아니었다.매번책작업의기둥을탄탄하게떠받치고 있던 노력의 몫이 9할이었다.뼛속부터 타고난글쟁이가 아니라서작가라는호칭은아직 낯설고 어색하다.설익은 글을 세상에 내놓는 용기만 가득할 뿐 모자란 그릇을 채우기에 나의 작가성은 턱없이 부족하다. 주제파악이 빨라서그 호칭에 욕심내지 않는다. 그저 몇 년이 지나도 글 쓰는 사람이고 싶을 뿐이다.글이 주는 힘, 마음에 닿는 깊이의 맛에 취해본 사람은 이따금씩글 한 모금홀짝 들이키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겹다.
사방으로 흩어진 기억들을 붙잡아 두는 것.
이리저리 흔들리는 생각을가지런히 정열 하여묶어두는것.
도둑맞은 내 마음을 제자리로 찾아 가져 오는 것.
내 것과 네 것의 모호한 회색지대에 나만의 색깔을 덧입히는 것.
정서의 거친 표면을 문질러 보드랍게결을 잡는 것.
파리하게 떨리는 내적파동과 울림을 가슴에간직하는 것.
내 세상에서 네 세상으로 건너간 떨림의 진폭을높여가는 것.
모두 글의 힘이다.
글은,써도 안 써도 큰일나지 않는다.티 나지 않아도 무시할 만큼 가볍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어제도 오늘도 똑같지만 내일은 뭔가 다른 기묘함이 있다.일단 쓰기 시작하면시시함도 사소함도다 사라진다. 모든 것을 호들갑스럽게 감각하게 된다. 무딘 나에게 뒤늦게 찾아온 글의 세계는 생의 우렁찬 뒷북이다. 시간과 정성을 훔쳐낸 마음 도둑이다. 단, 뒤져낸 생각과 마음을 고이 혼자만 품고 있지 않고 나눠주고 싶은 떳떳한 전리품이기도 하다. 내 마음에 찾아온 깊이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에도 깊이 닿기를 바란다.공감의 시간과 공감의 속도를 곱한 거리만큼이나 깊숙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