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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Sep 13. 2023

섣부른 인생 조언, 치기 어린 선심

처녀 교사가 출산한 제자 앞에서

교직 생활에서 무력 순간 직간접 경험치를 초월 상황을 만날 때다. 기본적으로 조언을 해주어야 할 위치라는 강박 깔고 있는 터라 개인적 경험 부재로 인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얼버무려야 하는 경우, 당황스럽다 못해 처참. 지금은 그러려니 넘길 수 있 무수한 그때 그 시절, 많은 감정 소모치기 어린 늦깎이 교사였다.


"선생님, 제가 교무실로 찾아가는 것이  그런데, 학교 밖에서 뵐 수 있을까요?"


난데없이 학생의 어머니가 한낮에 담임교사를 카페로 불러내셨다. 무슨 사연 인까? 전화 목소리만 듣던 어머니를 처음으로 대면하던 날, 갓난쟁이 하나가 품에 안겨 있었다. 여고생에게 느닷없이 늦둥이 동생 생긴 건가? 짐짓 놀랐다. 곧이어 어머니의  고 싶었던, 그러나 털 했던 가정사 이어졌다. 여고생 딸이 곧 출산예정이며 갓 태어난 늦둥이의 출생 신고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손자를 자식으올릴 것이라는 비밀스러운 계획까지. 듣는 내내 정신이 없었다. 딸의 인생을 위 엄마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혼 후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떨어져 살던 딸과 덤으로 딸의 자식까지 거두어들이겠다는 기구한 사연에 심장이 떨렸다. 졸지에 두 아의 보호자 돼야 했던 엄마 딸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지 못한 죄스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 만회하려 했다.


결혼도 출산도 해보지 않은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최대한 말을 꼈다. 영양가 있는 말을 지어낼 만한 경험도 없었고, 사회적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에 사안이 중대했으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 안 왔다. 어머니 마음에 괜한 생채기를 내지 않 위해 필요한 절차를   최선을 다 뿐이었.

석 달 후, 십 대의 제자는 도 겪어보지 못한 출산 소식을 전했다. 전화 한 의 안부로도 충분했을 텐데 왜 굳이 얼굴을 보려고 산부인과까지 찾아간 걸까. 그냥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가만히 들어주고 싶었다. 몸보신 거리들을 챙겨서 산고를 견뎌낸 제자를 마주했다. 생각보다 밝은 얼굴로 앞으로의 인생 대해 조잘다.


"선생님, 애 아빠가 결혼하자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왜 그랬어?"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좋은 남자 만나려면 좋은 여자가 되어야 해. 열심히 살."


철부지 여고생은 자기가 저지른 불장난으로 엄마에게 지운 짐의 무게를 감지 하고 있는 걸까. 철딱서니 없다 판단의 날을 세우면서도 후다닥 가식적인 조언을 포장해서 건네주었다. 속과 다른 겉을 꾸며내는 데 상당한 감정 소모 있었다. 나의 경험축 궤도 밖을 돌고 있는 제자의 삶에 무력감을 느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내가 살아본 생이 아니라서라고 착각했다.


좀 더 살아 본 지금이라면 뭔가 다른 말을 해 줄 수 있었을까. 답은 여전히 'No' 다. 제자는 생의 한 분량 도려내어도 여전히 창창한 십 대였다. 내가 늦깎이라면 그녀는 이른둥이라고 해야 할까. 없는 당돌함마저 없으면 미래의 인생 그림을 그려낼 조차 다.  가장 필요했던 것은 잘 포장된 조언이 아니, 있는 그대로 용인하고 토닥여 주는 것 아니었을까. 비난거나 내치지 않고 자신을 받아준 엄마 덕분에 벌거숭이가 된 생을 이겨낼 생뚱맞은 떳떳함이라도 쳤는지 모른다. 설컹설컹 치기 어린 그 다부짐을 둘러매고 그녀는 학교를 떠났다.  그 후로도 남자친구와 가출해서 자퇴 후 아이를 낳은 제자들을 수차례 더 만났다.




인생에 섣불리 조언하고 판단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아니, 조심해야 한다. 치기 어린 선심일 수 있도 있고 지극히 사적인 충고가 어느 끝에 닿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의 경험은 타인의 경험과 절대 합동관계가 아니다. 비슷해 보여도 다른 것 인생이다.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답이 없기에  각자의 길을 그냥 인정 주 것이 맞다. 미지의 영역이라 무력감을 느꼈지만 어떤 코멘트도 달지 않았던 그 어설픔이 여전히 최선의 답인 것 같다. 지금쯤 청소년기 자녀의 엄마가 되어있을 제자들은 여전히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그들에게 무슨 조언을 할 수 있으랴. 오히려 내가 육아팁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인생의 시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늦깎이도 있고 이른둥이도 있다. 주류 아니어도 인생살이라는 같은 길을 걸을 뿐이다.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때론 길을 잃기도, 때론 샛길로 빠지는 게 인생이다. 누구나 진행형일 뿐 완료형이 아니다. 표준화된 인생은 존재하지도 강요할 수도 없다. 상수보다 변수가 많은 나중에 어떻게 뒤집힐지도 모다. 섣불리 이래라저래라 방향등을 켜주는 호들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언젠가 한 선배 교사가 했던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아있다.


"난 이제 누구에게 조언 같은 거 안 하려고. 승진 점수도 따고 경력 될 것 같아서 단원고로 가라고 했는데, 학교를 옮긴 바로 다음 해에 세월호에 탔고 결국 아이들과 함께 수장되어 버렸거든.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려 평생에 한이 되어 남는 아픔이 되었다. 이제 충고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베푼 선심이 애끓는 한이 되었다. 인생을 격려하는 데 말이 다가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 잘했고, 지금도 잘하고 있고, 앞으로 잘할 것이라는 토닥임 하나면 충분하다. 만일 내가 그때 그 시절의 제자들을 다시 만난다면 아무 말 없이 그냥 꼭 껴안아 줄 것이다. '지금의 너로 충분하다.' 품 안담은 그 메시지 하나면 될 것 같다. 어떤 인생을 살던 정답이 될 따뜻한 힘, 조언이 아니라 수긍이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中, 찰리 맥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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