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나와의 만남이자 타자와의 연결이다. 내 마음과 생각을 훑고 나면 감정과 사유가 글의 형태로 흐른다. 흘러흘러누구에게, 언제,어디로, 어떻게, 왜 가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통과되길 바라며 그저 흘려보낸다. 누군가의 마음에물을 대듯 흥건하게 부을 수도 있고, 살짝 적시기만 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기쁨이다. 때론 가로막혀침투조차 못할 수 있지만실망보다는 인정을 택한다. 각자가 경험하는 인생의 숨결과 질감이 다르기에 내 글의 입자가 다른 이의 마음 밭에 흡수되기도 하고 걸러지기도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래도위안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어도비슷한 생각과 선호를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작가의 전율에 대해 조금이나마 처음 이해했던 것은 3년 전, 블로그에 댓글 하나가 달렸을 때였다. 개인 기록용으로 시작한 터라 아직도 미미한 수준의 공간이지만 아이의 엄마로서 품은 마음을 글로 풀어낸 어느 날이었다. 블로그 이웃도 아닌 분이 지나가다가 우연히 글을 읽고 큰 위로와 방향을 잡을 수 있어 감사하다는 답글을 길게 남겨주셨다. '내 글을 누가 읽어주시다니?'의 당혹감과 '미미한 글이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는 힘이 있구나'란 뿌듯함을 처음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작가들이 펜을 놓지 못하는 이유와 의미를 살짝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출간한 이후로 간간이 책에 대한 반응들을 인터넷으로 살핀다.평가에 민감한 직업 탓인지, 달든 쓰든 독자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영어 필사책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훑어본다. 내 책으로 두 권째 영어필사를 하고 계시는 고마운 분이셨다. 그저 영어 공부 자체의 목적보다는 문학 속에서 좋은 문장들을 통해 마음도 힐링받는 '저자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다른 책도 구매하게 되셨다고 한다. 꿈꾸었던 방향으로 영어 필사책을 집필했던 의도가 그대로가닿았다.말미에'계속 좋은 문장을 수집해서 책을 꾸준히 내주셨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겨 주셨다. 한참 뭉클했다.나의 스타일이 어필되는 독자님이 단 한분이라도 계신다는 사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이 되었다.
혹자는 그냥 있는 영어책들을 여기저기서 발췌한 책이 너무 비싼 거 아니냐는말을 툭 내뱉고 지나간다. 책을 직접 집필해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단순한 짜집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머리에서 직접 빼내는 창작의 노고가 부재해 보이는 측면에서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하지만 원고를 완성하는 데 들이는 에너지는 그리 만만치 않았음을 고백한다. 물론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치라 절대적이지는 않다. 다만 다른 영어 필사책을 쓰기로 계약했던 저자가 중간에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편집장님께 전해 들었다.생각했던 것처럼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사유로 들었다고 한다.적어도어렵지 않은 것이 쉬운 것과 동격은 아니라는 가늠을 해볼 수 있다.
원서 한 권을 꼼꼼하게 읽고 오롯이나만의 해석으로 소화하는 것을 기본으로방대한 양 속에서 뽑아낼 만한 문장과 문단을 일정 분량으로 선별하는 과정, 그 외 기타 등등이단순 짜집기가아님을 알아달라는 건 아니다. 그냥, 모든 책은 툭 던지는 말처럼 툭 하고 나오는 게 아님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어떤 책도 쉽게 쓰이지 않는다.나 역시 출간 후로 책을 보는 각도가 달라졌다. 펼쳐드는 모든 책들마다고민하고 고심한 저자의 시간들에경외심을 갖게 된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 이 책 한 권이 나오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한 줄 한 줄을 허투루 볼 수 없다.
계속 꾸준히 책을 내어주길 바라는 한 분의 독자님 덕분에 출판사와 계약한 마지막 필사책 집필에 힘을 내본다. 이전 책과 살짝 다른 새로운 기획으로 틀을 잡고 있다. 막바지 작업에 들어선원고를 이번에는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가보려 한다.책 집필이 먼저가 아니라 건강이 먼저라는 새해 기조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풀타임 작가들도 장기간의건필을 위해 몇 시간씩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챙긴다고 한다. 그들의 발꿈치에도 못 미치는 초보가 무조건 배워야 할 삶의 태도인 것 같다. 쉽게 쓸 수 없는 책, 이를 위해 쏟아내는무거운 에너지, 잘 안배하는 연습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