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아이 건강 상태가 이상하다. 갑자기 시작된 콧물과 재채기가 멈출지를 모른다. 혹시나 몰라서 해봤던 코로나 자가 키트의 반응도 음성이다. 지켜보다 보니 '알레르기'나 '비염' 증상 같기도 하다. 시계를 보니 낮 4시가 넘었다. 주말, 이 시간까지 하는 소아과는 없다. 그렇다고 '응급실'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일단 집에 있는 비상약을 먹이고 상황을 지켜봤다.
다음날인 오늘은 일요일, 오전 일찍 소아과를 가려고 나섰다. 주말에는 제주시 소아과 두 군데 정도가 오픈하는데, 아이들이 주말을 피해 아픈 것은 아니므로 다들 주말에 하는 그 소아과를 찾아간다. 주말에도 오픈하는 소아과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9시에 오픈하자마자 30분 내로 예약 마감이 된다. 오후 1시까지 진료인데 오전에 조금만 늦게 도착해도 진료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도 처음에는 주말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10시쯤 왔다가 예약 마감이 돼서 진료도 못 보고 되돌아가 본 이후로는 정신 차리고 움직인다. 오늘은 7시 반에 일어나 8시에 소아과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면 8시 반쯤 도착하는데, 도착해서 이름을 적고 나니 10시쯤 진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제주에 와서 병원을 이렇게 자주 갈 것이라 생각해봤을까? 사실 겨우 일 년을 사는 것인데 병원에 몇 번이나 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아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고작 일 년인 제주생활에 소아과를 이미 네 곳이나 다녀왔다. 처음으로 갔던 소아과는 금방 진료를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나 약이 너무 셌고 두, 세 번째 소아과는 손님이 정말 많고 약은 조금 약했고, 네 번째 소아과는 주말에만 이용한다. 이제는 남편에게 "내일 소아과에 가자"라고 말을 꺼내면 자동으로 "이번엔 어디 소아과 갈 거야?"라고 묻는다.
제주 도민이 다 되었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우리가 레귤러 데이라고 부르는 날이 있는데 그날은 정말 노멀 한 하루를 보내는 날이다. 그날은 아이를 등원시키고, 도서관에 갔다가, 커피를 마시고, 마트에 가서 장을 가득 보는 그런 날이다. 제주에 왔다는 설렘과 관광지에서 벗어나 그날은 제주 도민으로서의 평범한 하루가 시작된다.
서울에 살 때는 새벽 배송, 로켓 배송, 당일배송을 이용하거나 대형 브랜드 마트를 위주로 식재료 쇼핑을 했다면 이곳에서는 제주산 재료가 다양하게 파는 마트를 간다. 특히 내가 자주 가는 ㅎㄴㄹ마트가 있는데, 그곳에서 주로 고기, 생선, 과일 등을 산다. 특히 제주산 식재료를 많이 판매하는 곳이라 자주 들리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웬만하면 제주에서 난 식재료를 사려고 노력한다. 농협에서 운영하고 있는 이 마트는, 제주 전역에 곳곳 위치하고 있어서 가까운 곳을 이용하면 된다. 흥미롭게도 제주 전역에 체인점을 가졌는데, 지금까지 다녀왔던 곳마다 비슷하지만 다른 형태의 모습의, 비슷한 식재료를 파는 등의 각각의 개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겨울에 제주산 갈치와 싱싱한 전복을 사다 먹었다. 그리고 제주에서 낳고 자란 닭과 계란을 구매하고 있다. 계란 브랜드 이름이 '애월 아빠들' 그것 참 제주스럽다. 그것 외에도 제주에서 키운 귤, 한라봉, 황금향, 천혜향, 딸기는 물론 무, 감자, 당근, 브로콜리, 시금치 등을 구매하고 있다. 이제는 어떤 마트에 갈까 생각하기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차를 끌고 간다.
겨울 내내 집에 등유가 떨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했다. 이사 온 직후 보일러의 방향을 '온수'로 설정해놓았다. 하루 한번 씻으면서 보일러를 온수로 해놓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분명 서울에서는 늘 온수가 자동으로 나왔는데... 아무튼 이곳은 온수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주기 위해 계속 보일러가 돌아갔다. 그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결국 등유가 다 떨어져 버렸다. 하필 아이를 목욕시키는 중에 그렇게 돼서 찬물로 목욕을 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는 춥다고 울고불고, 덜덜 떨며 마무리했다. 그렇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는 등유가 떨어지지 않게 수시로 체크하고 있다.
겨울에는 보일러가 자주 돌아가니, 등유가 빨리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시로 등유가 떨어지는 것을 체크하다가 어느 시점이 오면 자연스럽게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찾아 누른다. 그렇게 전화하면 등유 넣어주시러 오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유차를 타고 보통 30분 ~ 1시간 내로 오신다. 겨울에는 3주 걸러 한 번씩 봤으니, 어느덧 그분들과도 안면을 익혔다. 그래서 이제는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눈다. 처음에 주택에 이사 와서는 '집에 등유를 넣어야 하는 거야?' 하면서 황당해하던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제 등유가 떨어지면 서둘러 채우는 것도 익숙해지는 때가 왔다.
서울에서는 브랜드 카페를 자주 이용했다. 그런데 제주에는 워낙 핫한 카페가 많아서 매일 새롭게 다니고 있다. 제주는 정말 카페의 천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즘 단골처럼 가는 카페가 두 군데나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들려서 자리를 잡고 앉아 일상을 정리하는 날이 있다. 매주 가면서 익숙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분 거리의 카페로 걸어간다. 키오스크에서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늘 같은 자리에 앉아서 작업을 시작한다. 어느 멋진 카페를 가볼까 고민하며 검색하지 않아도, 늘 같은 커피 맛과 장소로 나를 안정감 있게 만들어주는 나만의 제주 단골 카페이다.
어느덧 제주에 와서 살게 된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흐르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일 것 같은데 어느덧 이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이제는 제법 제주 도민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몸이 기억하는 루틴이 생기고 이처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상도 있다.
이제 나에게 제주도는 설렘을 지나 익숙함이 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단골 소아과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제주 도민이 다 되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아이가 아팠을 때는 발을 동동 구르며 인터넷으로 제주시 소아과를 검색했는데 이제는 아이의 건강 상태에 맞는 소아과를 찾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쩌면 완전히 제주도민으로 적응했을 즈음 나는 이곳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냈던 모든 순간들을 추억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익숙해진 것들을 떠나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크다. 그래도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제주 도민으로서 재밌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나중에 떠나더라도 아쉬움이 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