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나의 생활의 반할은 주부 모드이다. 아침에 일어나식사를 준비하고 (보통 냉동실에 얼려진 것들 데우거나, 인스턴트를 데우는 정도지만) 아이를 깨워 유치원에 갈 준비를 시킨다. 오후에는 간식을 준비하고 저녁이 되면 또 식사를 준비한다.
일주일에 사흘은 외출은 하고 이틀 정도는 집에서 집을 지킨다. 특히 월요일은 집에 있는다. 집에 있는 날은 아이가 가자마자 청소기부터 돌리고 차를 우리거나 커피를 내린다. 요즘은 거의 숭늉을 끓여마시는데 오늘은 숭늉 대신 디카페 커피가 있길래 뜨거운 물을 끓였더니 아니 티백 원두라서 보리차보다도 못한 커피를 마시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냥 버리고 말았다.
오늘같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아무리 제주라도 매일 놀러 나갈 데도 마땅하지 않다. 특히 월요일은 집안 정리를 한다는 이유로 집에 있곤 하는데 주말인 어제 잡초도 뽑고, 이불도 다 빨아 널고 했더니 다행히 해야 할 큰 집안일은 없었고, 아침에 수건 빨래만 빠르게 세탁기에 돌려서 오전 중에 모든 일이 끝났다.
늘 밤늦게 잠드는 터라 아침엔 몸이 무겁기 때문에 더 누워있을까? 그냥 할 일을 할까 늘 고민하는데, 오늘은 식탁의 내 고정 자리에 앉아서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을 즈음에 갑자기 졸음이 몰려와 다시 침대로 향했다. 풀썩 쓰러져 건조기에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으니 잠이 반쯤 들었다. 그러다 건조기가 다 되었다는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켜 빨래를 빼놓고 다시 침대에 풀썩 누으니, 아 좋네. 정말 좋네.
쓸데없이 몸에 부지런함이 배어 있어서 한번 깨어난 후에는 다시 침대로 눕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으나, 어느 날부터 잦은 두통이 찾아오면서 그리고 새로 산 침대가 푹신하니 마음에 들어 자주 눕게 되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전업주부라 참 좋네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간에 침대에도 누워보고...
전업주부의 삶이 80% 정도마음에 들지 않지만, 20% 마음에 드는 것은 남편과 아이가 모두 떠나간 적막한 집이라던지, 청소 후 깨끗해진 집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과 함께 책을 읽는다던지, 이렇게 한낮에 침대에 누워서 낮잠을 잔다던지, 빨래를 햇볕에 널어서 보송보송하게 만들 때라던지, 청소기를 돌릴 때라던지 그런 경우이다.
보통은 종일 집을 돌며 어질러진 곳을 정리하고, 신발과 실내화를 정리하고, 그릇을 정리하고, 아이의 장난감을 정리하고, 빨래를 빨고 개고, 아침저녁으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고, 심지어 매일 간식은 무엇을 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 매일 티도 안나는 이런 일을 매일 하고 있자니 이러한 삶이 벌써 지긋지긋하다. 딱히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 아무나 할 수 있는 이런 일들. 그러나 내가 집에 있는 사람이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이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일이다.
나머지는 작가로서의 삶이다. 아마도 이 집의 가장이 아니어서 다행히도 자유롭게 꿈꾸는 삶이다. 집안일 이외의 시간에는 읽고 쓰고 있다. 일전에 맛보기로 작은 책을 두권 만들고 진짜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렇게 제주에 왔다. 마치 이곳에서 나는 정말로 대작가로 다시 태어날 것 만 같았다. 꼭 언젠간 나도 잘 팔리는, 그럴듯한 책을 쓸 수 있겠거니 하는 희망을 품고 있다. 우리 엄마는 진짜 작가도 아닌 내게 늘 작가 딸이라고 말해준다. 사람들이 "딸은 왜 제주로 가서 살아?"하고 물어보면 "글 쓰러 갔어"라고 말한다. 마치 내가 대단한 글을 쓰는 것 마냥...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는 엄마가 있어서 참 위로가 된다.
무엇보다 종일 새소리가 지저귀고, 초록초록 멋진 가든뷰를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끄적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된다. 누구보다 그럴듯한 내가 된다. 나로서의 기쁨과 충만함이 샘솟는달까.
언젠가 산속에 들어가 홀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제주의 이곳 산 중턱에 자리 잡으니 딱 그 꿈을 이룬 것 같다. 이곳은 너무나 자유롭다. 하루 종일 새소리만 들린다. 만나고 싶지 않은 누구를 만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를 보며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있든 없든, 무엇을 먹고 살아가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날 너무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때때로 생각보다 이 삶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나는 이대로 산속에서 영원히 고립되어 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다만 남편, 아이는 필요하다. 혼자는 조금 겁나니까)
모든 것이 평화롭다. 몸이 조금 지칠 때 누울 수 있고, 책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브런치 공간이 있어서 참 좋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