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여러 가지역할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엄마, 아내, 딸로서의 위치일 것이다. 그밖에 시누이라는 역할도 한다. 시누이... 어감이 좋지 않다. 오늘은 오랜만에 새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나에겐 친오빠가 있다. 그래서 10여 년 전 새언니가 생겼다. 새언니와 오빠는 10년을 넘게 연애하고 결혼했다.벚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내가 언니를 처음 만난 때가 종종 떠오른다. 그때 내가 고3 때였는데, 야간 자율학습 끝난 나를 오빠가 차를 끌고 데리러 와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끔찍이 아끼는 동생이라, 늦은 시간 끝나니까 데리러 온 것은 아니었고 매일 저녁 데리러 오는 엄마의 차를 끌고 오빠가 여자 친구(새언니)를 만나러 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날 데리러 올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그날 그 둘은 함께 왔다.
우리가 고등학생일 때는 야간 자율학습이 필수였는데, 그때 하교하는 시간이 몇 시였을까? 좀처럼 기억나지는 않는다. 10시는 무리고 9시는 되지 않았을까? 그날 처음 만난 우리는 엄마 차를 끌고 함께 벚꽃구경을 갔다. 시내는 이미 벚꽃이 져버린 시점이었는데, 아직 산속에는 숨겨진 벚꽃이 피어있는 장소가 있었다. 언니가 가져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벚꽃나무 아래에 선 교복 입은 나를 찍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린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때 내가 만난 언니는 이미 직업이 있는 직장인이었다. 말로만 듣던 연상연하 커플이 이곳에 있었다. 처음 만난 그날이나 지금까지도 언니는 꽤 당찬 사람이다. 언제나 추진력 있고 용기 있는 모습이 멋지고 좋았다. 우리와는 다른 성격의 사람. 그래서인지 언니는 가끔 오빠가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빠와 나는 너무도 똑같은 취향을 갖고 있는 덕분에 언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둘이 연애하는 동안 10여 년 중간에 오빠는 군대를 다녀왔다. 언니는 매주말마다 면회를 갔다. 운 좋게도 집과 가까운 1시간 내외의 거리여서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군인 신분의 오빠는 참 좋았겠다. 그때는 사랑이 전부이던 시절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매주 언니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문제는 초보운전이었던 언니는 아빠의 차를 몰고 그곳을 왔다 갔다 했는데 어느 눈이 오던 날, 둘은 차를 끌고 가다 사고를 냈다. 오빠랑 언니는 나란히 입원을 했고 그 자동차는 폐차를 시킬 수밖에 없다고 들었다. 서로의 부모님들은 그날 병원에서 만나 인사를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 사건으로 언니네 부모님이 오빠를 아주 탐탁지 않아했다고 들었다.
2년의 기다림
전역 후로도 그들은 계속 만났다. 나도 고무신을 해봐서 아는데 2년을 기다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그만두고 말았으니까. 그 외에 그 둘은 중간에 헤어진적이 없던가? 그건 모르겠다. 그렇게 그 후로 그들에겐 큰일 없이 순탄하게 지내는지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큰 병에 걸렸다. 언니가 병원에 입원을 해서 우리 가족은 병문안을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는 그곳에서도 언니는 씩씩했다. 다행히도 예후가 좋았던 암이라 치료를 받고 나았다. 고모 중에 그 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어서 우리 가족은 더 마음 쓰여했다. 지금도 추적관찰 중이긴 하다. 언니의 병이 재발하기 않길 늘 기도하고 있다.
언니가 아프다는 이유로 아빠 엄마는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내가 부모님께 감사했다. 10여 년 동안 연애하던 그들은 끝내 결혼에 골인했다. 둘은 연애하는 기간이 워낙 길었으니 헤어지지 않고 결혼한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로 아이 둘을 낳았고 순식간에 십여 년이 흘렀다. 둘은 이미 함께한 기간이 20년이 넘었다(와우...).
오빠랑 언니가 10년을 연애하는 동안 나는 언니가 너무도 우리 언니 같아서, 아니 나에겐 항상 친언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오빠가 데려온 언니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마치 친언니처럼 대했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실수한 적도 많았을 것이다. 어린 시누이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그래서 그랬는지 후에 시간이 흘러 언니가 연애할 때 나땜에(시누이) 몇 번을 헤어질뻔한 위기가 있었다고 말해줬다. 웃으며 그때 헤어졌어야 하는데 하는 얘길 하곤 했는데 진지할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는 무슨 얘기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시간이 흘러보니 며느리는 시금치도 싫어진다는데,내가 시누이니까 엄청 미웠을 때도 있었을 테고 아마 그게 그런 얘기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시월드에 입성한 후, 시댁의 세계를 알게 된 후 차츰 언니에게서 연락을 줄여나갔다. 그 전에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나는 언니가 우리 친언니인 줄 알았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가끔 내가 시누이인걸 잊고 지내기도 했다.
시간이 더 흘러 이제는 일 년에 세 번 정도만 전화를 건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한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 때는 보통 부모님의 생신으로 상의를 할 때이다. 그리고 한 가지는 어버이날이다. 먼저 오빠와 연락을 해서 조율하곤 하는데 꼭 중간에 얘기가 끊겨서 언니랑 전화통화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나는 외국에서 살 때도 있고, 서울에서, 그리고 이제 제주에서 살게 되니 당일에 생신을 챙기는 것도 어버이날도 챙기는 것도 오빠 내외다. 나도 자식의 도리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그들에게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고맙고 미안하다.
사실 언니랑 전화를 더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전화 통화할 때마다 우울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하지 못하는 가족 얘기, 남편 얘기, 아이들 얘기를 우리끼리 한다. 특히 언니는 남편(나에겐 친오빠) 얘길 친정이나 다른 친구들에게 섣불리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 하소연을 내가 듣곤 한다. 나야말로 내가 가진 어려움을 속시원히 말하곤 하니 우린 꼭 둘 중에 하나는 울면서 전화를 끝낸다. 매번 그런 식이니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 전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말하고 싶지만 난 이제 더 이상 전화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시누이일 뿐이니까.
그래도 몇 년 전 한창 가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을 때는 서로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지만 친오빠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가족으로 살아간다.
반갑지 않은 시누이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기꺼이 전화받아주는 언니가 참 고마울 뿐이다. 앞으로도 전화는 물론 만나는 일도 많이 하지 않으려 노력할 테니 그저 언니랑 오빠랑 오래도록 평화롭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언니는 나에게 오빠만큼이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