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었나봐, 감

가을의 맛

by Blair

요즘 간간이 비가 조금 왔는데 덕분에 잔디가 많이 자랐다. 아니 실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잡초도 뽑고 잔디도 깎느라 바빠진다. 지난번에 산 수동 잔디 깎기는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보기엔 작고 힘없어 보이지만 소리도 크지 않고 생각보다 알차다. 그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수동 잔디 깎기로 정원을 오고 가느라 여념이 없다.



작은 수동 잔디 깎기 기계로 잔디를 깎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나뭇가지와 돌이다. 잔디를 깎는 도중에 나뭇가지가 걸리거나 돌이 걸리면 잔디 깎기 기계가 멈춰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일이 잔디 깎기 날에 낀 나뭇가지를 빼주거나 돌을 꺼내 멀리 던져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뭇가지나 돌이 문제가 아니다. 벌써 익어버린 감이 하나둘씩 땅에 떨어져서 뭉개지고 있다. 그 사이로 갖가지 벌레들이 모여 신나게 파티 중이다. 잔디를 깎다 말고 바닥에 떨어진 감을 하나씩 들어내기 시작했다. 벌레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잔디를 깎는 게 우선이었다. 땅에 떨어진 감 중에 조금 멀쩡한 것은 돌 위에 올려놓았고 도대체 형태를 알 수 없는 감은 화단으로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화단의 거름이 되거라'







작년 10월 하고도 열흘이 지난날. 처음 제주 집에 도착했을 때 감나무에는 감이 열려있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그 나무가 감나무인지도 몰라봤다. 어느 날 문득 정원의 나무들을 살펴보는데 손도, 도구도 닿지 않는 곳에 감이 한두 개가 남아있어 '내가 감나무야' 하고 알려줄 뿐이었다. 대신 옆에 노랗게 익어 가고 있는 귤이나 한라봉에 더 눈길이 갔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막 제주에 살게 된 제주도민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제주 하면 귤이지!



그랬던 감나무가 시간이 흘러 다시 일 년. 어느 날부터 작은 초록 열매가 많이 생겨나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 추석을 맞이할 즈음 초록색으로 있던 감들이 본격적으로 익어갔다. 감들이 노랗고 주황색으로 익어가며 자신이 존재하는 위치를 알려준다. 어느 날 감들이 이렇게나 탐스렇게 익어가고 있는데, 바닥에만 자꾸 떨어지는 게 아쉬워 남편과 아이와 함께 감을 따기로 했다. 아이는 쉽사리 손이 닿지 않아 아빠의 어깨 위로 올라가 목마를 탔다. 그제야 감으로 손을 뻗어 감을 따려고 시도해 본다. 그런데 감이 생각보다 쉽게 따지지 않는다. "힘을 내!!" 하고 소리쳐주자 아이는 젖 먹던 힘을 내어 감을 따 본다. 나뭇가지가 휠 뻔했다. 그 조그만 몸에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니?





제주 집 정원에 자리한 감나무






아이와 따온 감과 내가 몇 개의 감을 더 따와 한 자리에 앉았다. 마침 딱 적당히 익어 어여쁜 감, 과하게 익어서 뭉그러진 감, 보통은 많이 익어 말랑말랑한 감들이었다. 여섯 개의 감이 한 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하나씩 반으로 갈라 숟가락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과하게 익은 감의 씨 부분은 이미 시큼한 맛이 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딱 맛있게 익은 것은 그중에 겨우 두 개. 그래도 마트에서 사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키우고 딴 감'이라는 생각에 시큼한 부분을 잘 피해서 열심히도 먹었다.



시큼한 감을 먹고 나니 다음부터는 조금 단단한 감을 미리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집에 두고 익혀먹으면 더 잘 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경험해봐야 알게 되는 것들. 그동안 마트에서 잘 포장된 감만 사 먹다가 직접 따 먹으니 이런 깨우침도 얻는다.




실은 어린 시절 오래도록 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감을 좋아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려나? 적어도 나에는 그랬다. 감보다 맛있는 과일이 훨씬 많았으니까.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며 감이 좋아지게 되었다. 지금도 '감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감의 부드럽고 은은한 달콤함이 주는 매력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



며칠 전에 초록색의 단단했던 그것이 점점 노랗고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매일이 똑같은 것 만 같았는데 분명 시간이 흐르고 있었구나 알 수 있다. 제주의 시간. 그것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연이 알려주고 있었다. 가을을 알리는 은은한 달콤함.











우리 아이가 탐내는 옆집 석류






우리 집 감나무가 신나게 익어갈 때 옆집에는 석류가 익어간다. 그 작은 석류나무에 석류가 정말 넘치도록 달려있다. 떨어진 석류도 제법 많다. 석류를 좋아하는 아이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석류나무를 한참을 바라본다. 아이는 떨어진 석류가 많다며 아깝다고 이야기한다. 정작 이웃집 주인은 석류나무에 관심이 없는지 열매가 달리고 떨어져도 하나 따는 법이 없다. 아이와 함께 우리 집에 있는 감을 조금 따 가지고 와서 옆집 석류와 바꿔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본다. 우리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



우리가 언제 감나무와 석류나무를 이렇게 자세히 보고 살아봤던 적이 있었던가. 태어난 지 몇 년 되지 않은 아이도, 30살이 훌쩍 넘은 우리에게도 이토록 자연과 가까운 집은 처음이다. 태어나 줄곧 아파트, 그 편한 곳에서만 살다가 이 멀리까지 와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가을이면 감나무가 주렁주렁 열리던, 겨울이면 귤과 한라봉을 가득 내어주던 제주 집 정원 그리고 이웃집에서 열리던 석류나무, 반대편 작은 밭을 바라보면 보이던 무화과나무들. 나는 아마 이곳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메인 사진 : https://pin.it/317y2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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