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여문 알밤

by Blair


동네마다 커다란 밤나무에 잘 익은 알밤이 가득 여물어있다. 열매 맺은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참 동안을 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밤이 싫은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다르게, 나에게 주어진 밤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기분이 들어서 별로였다.



그 이유인즉슨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가을이 되면 어머님이 밤을 사다 주셨다. 밤을 사다 주시는 것은 좋았는데 꼭 절반만 깎인 밤이었다. 겉껍질만 깎인 밤... 살림 초보인 나는 이것을 대체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랐다. 아예 까지 않은 밤이라면 쪄서 반으로 잘라 파먹으면 될 것이고, 완전히 까진 밤이라면 밥을 지을 때 넣어 밤밥을 해 먹어도 좋을 텐데... 꼭 겉껍질만 깎인 밤을 사다 주셨다.







맨 위에 놓인 밤이 겉껍질만 까진 상태




한참 동안을 그런 밤을 사다 주시는 대로 먹었다. 문제는 겉껍질이 깎인 밤을 쪄서 칼로 살만 발라내다 보면, 살림 초보인 나는 절반 정도로 작아진 밤을 아이에게 주곤 했다. 먹이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았다. 게다가 껍질 벗기는 것은 어찌나 어려운지 손이 칼로 베이기 일쑤였다. 아팠다.



그래서 언젠가는 참다못해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어머님, 밤을 사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예 깎인 밤을 사다 주시던지, 아예 안 깎인 밤을 사다 주시면 안 될까요? 밤 껍질을 까먹기가 정말 어렵네요" 그런데 어머님은 내 말을 기억하지 않으신 것인지... 그 이후로도 절반만 깎인 밤을 사다 주셨다. 대체 왜...



몇 해를 그렇게 보내고 어느 날 그 밤 껍질을 깎다 지쳐버린 나는 그 밤을 냉동실에 처박아두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밤을 맛있게 날보다 냉동실에 넣어 보관만 하다 버리거나, 썩혀버리는 일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몇 해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손으로 밤을 사는 일도 절대 없었다. 솔직히 밤 까기가 싫어서 밤은 쳐다도 안보는 날이 더 많았다.



밤에 대한 마음은 냉동실에 보관된 밤처럼 차갑고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게 밤은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재밌게도 올해 가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 밤, 고구마, 대추 그런 가을 열매들이 내 머릿속에 떠다녔다. 우리 집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것을 보며, 곧 밤도 먹을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이 매번 밤을 챙겨다 주신 후로는 밤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는지 알았는데, 사실 밤은 맛있다. 밤이 분명히 맛있는 열매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 밤이 먹고 싶네."



그러던 어느 날 농협 마트에 갔는데 (이런 열매는 대형 브랜드 마트가 아니라 농협 마트나, 시장에서 사야 할 것 같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밤들이 한 움큼식 묶여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말 토실토실한 밤이라 안 사 올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도 한 묶음을 사 왔다. 알이 통통한, 실한 밤이 가득 들어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서둘러 씻어서 채반에 올려 냄비에 넣고 쪘다.



밤을 찌는 오후





밤이 쪄지는 그 시간 내내 빨리 밤이 먹고 싶어서 마음이 요동쳤다. 결국 중간에 참지 못하고 열어서 밤을 하나 꺼내 물었다. 조금 많이 뜨거웠지만 입으로 깨무니 반으로 갈라진다. 스푼으로 조금 떠먹으니 서걱서걱... 역시 아직 덜 익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조금 더 기다렸다가 불을 끈다. 남은 잔열로 조금 더 익혀질 것이다.




이제 밤이 다 익은 것 같다. 소반에 밤을 잠시 식혀둔다. 안 그러면 밤을 베어 물다 그곳에서 나온 뜨거운 물에 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여러 번 당했다) 한 김을 빼어둔 밤을 그릇에 담아, 차 숟가락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밤을 입에 넣고 깨물면 반으로 갈라진다. 얼마나 간단한지 모른다. 겉껍질만 까진 밤을 다시 까먹는 일처럼 수고스러운 것이 없다. 이제 반으로 갈라진 밤에 숟가락을 넣고 떠먹으면 되니 얼마나 간편한지 모른다. 일단 밤을 한두 개 먼저 먹고, 조금 더 식힌 후에 아이를 불러 한 입, 두 입 넣어준다. 아기새처럼 잘도 받아먹는다. "엄마 오랜만에 밤을 먹으니 맛있어요!" 아이가 넙죽넙죽 밤을 받아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어미다.



어른들이 그랬다. 가을이 되어 수확한 밤을 먹으면 밤처럼 살이 통통하게 오른다고,,, 엄마는 그 얘길 듣고 그 덜까진 밤이라도 열심히 먹여보려고 했었단다.










주말을 맞이해서 앞집 아이가 놀러 왔다. 이번 주말 간식은 밤이다! 냄비를 꺼내 밤을 찌기 시작했다. 냄비에서 한참을 끓는 소리가 나고 시간이 지나자 밤이 익었을 것만 같다. 다 익었나? 보려고 밤을 꺼내어 숟가락으로 떠먹어본다. 그런 나를 보더니 이웃집 아이가 와서 "이모, 저도 밤 주세요"라고 말한다.



이웃집 언니가 밤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는 것을 보더니 평소에 입이 짧은 우리 아이도 옆에 와서 앉는다. 둘은 함께 밤을 먹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언니는 숟가락을 들고 야무지게 밤을 파먹는다. 우리 아이는 몇 번 해보더니 먹는 것보다 흘리는 것이 더 많아 나의 도움을 받는다.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밤을 먹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예쁘다.



창 밖의 파랗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밤을 한 입 떠먹으며 '아... 진짜 가을이구나.'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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