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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Dec 08. 2022

이곳만의 시간이 흐른다.

가을 지나 겨울이 되었다. 어느새 제주 집에 열린 초록 귤이 익어 주황색으로 변했다. 이곳에서 사계절을 지내고 나니 다시 주황 귤을 만났다. 시간 참 빠르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거짓말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세상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게도 느껴진다. 제주에 살면서 세상의 시간이 멈추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반대로 서울의 시간은 몇 배로 더 빠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며칠 전에 보낸 서울의 하루는 마치 제주의 한 달처럼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것도 많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다시 제주로 돌아오니 또 시간이 멈췄다.




서울에 살 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길게 친정에 다녀올 때가 있었는데, 친정에 가면 이상하게도 현실 세계와 단절된 느낌이 들며, 시간이 멈추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오면 시계가 다시 째깍째깍 빠르게 움직이곤 했다. 그런데 제주에 사는 것이 딱 그런 기분이다. 마치 세상의 시간이 멈춘 느낌이다.




신기하다. 어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간이 멈춘다는 의미는 곧 걱정이 off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태생이 걱정이 많고, 평소에도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거의 매일 같이 자잘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데 제주에 와서 살게 되어, 이곳의 시간을 살게 되니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분명 원래의 나라면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사서 하고는 하는데 이곳에 와서는 걱정의 양이 100에서 20 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 체감상 80 정도는 줄었지만 아직 20 정도가 남아있어서 때때로 불쑥 예민해져서 까칠하게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의 날은 주로 평온한 마음을 가진 상태로 사는 날이 많아졌다. 더 흥미로운 것은 '될 대로 돼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이 자꾸만 들며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아마 꼭 제주가 아니라도 되었을 것 같다. 근데 분명 제주라서 좋다. 꼭 한번 이렇게 가깝고도 먼 곳으로 멀리 멀 리 떠나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끝도 없이 하며 살아보고 싶던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깝고도 먼 제주, 게다가  나는 캠핑을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제주의 집은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캠핑을 하는 기분도 들고, 펜션에 여행 온 기분도 든다. 특히 볕 좋은 날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한잔 내려갖고 집 앞 데크에 앉아있으면 마치 이곳은 지상의 낙원 인듯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서 이런 평화를 느끼다 보니 평소에 가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 훨씬 줄어든 기분이다.






제주의 시간...






무엇보다 제주에서는 언제든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 일주일에 한두 번, 바다 가까이에 있는 갈 수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바다에 갈 때면 모든 걱정을 그곳에 두고 와버리려고 노력한다.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도 100의 걱정을 전부 내려놓고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지만... 그런 날이 오길 기대라도 해본다. 이곳에서 나를 조금씩 치유한다. 토닥인다. 멘털이 약한 나라서,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나라서 아마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가 또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몸이 아프니 이성을 잃어가는 느낌이다. 기력이 쇠하는 느낌. 끝없이 피곤해오고 의욕도 사라져 간다. 깊은 생각도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긍정적인 마음이 들 리가 만무하다.



꼭 내 몸 상태처럼, 제주도 매일같이 날씨가 흐리다. 제주의 겨울, 온도와 별개로 바람이 많이 불어 더 춥고 싸늘하다.



오늘은 비가 내렸다. 창문을 여니 마치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에서 나는 냄새가 났.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어나 아이를 등원시키고, 겨우 고양이 밥을 챙겨주고, 커피를 내리고, 창밖에 오는 비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



이곳의 시간이 흐른다. 이곳에서의 시간을 조금 더 아낌없이 즐기고 싶다. 리고... 조금만 더 내려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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