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7시에서 8시 사이즈음 이미 바깥세상은 깜깜하다. 거실에 앉아 아이와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하고 두드렸다. 나는 우리 집에 이 시간에 누가 온 것일까 의심하지도 하지 않은 채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낯선 남자가 그곳에 서있었다. 오 마이 갓!!!!
조심해야 했다. 의심해야 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을 수도,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 집엔 벨이 없다. 당연히 인터폰도 없다. 그리고 아파트 문에 밖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작은 구멍도 없다. 저녁인 데다 불투명 창문이라 실루엣도 보이지 않아 밖에 누가 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번도 의심할만한 누군가 올 것이라 걱정한 적은 없었고, 가끔 깜깜해진 밤에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불안해지기도 했지만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방이 깜깜한 주말 오후에 들린 똑똑 노크소리. 차라리 문을 쿵쿵 두드리지 않아 다행일까? 그랬으면 오히려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이 시간 우리 집 문을 노크하는 사람은 앞집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낮부터 우리 집 아이는 앞집 아이들과 놀았고, 6시 즈음 생각보다 집에 일찍 돌아왔다. 나는 그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다시 우리 집에 잠시 놀러 왔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주말이면 시간과 상관없이 앞집을 오고 가곤 하니까... 그래서 더욱 그 노크소리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집에 올 때는 늘 뛰어 오기 때문에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우당탕 소리가 들린 그 후에 노크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잊었었다. 덕분에 별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낯선 사람의 정체는 잡상인이었다.새해를 맞이해서 '복조리'를 팔러 오셨다. 하필 사방이 깜깜해진 저녁 시간에... 나는 복조리를 사고 안 사고를 떠나 낯선 사람인지도 모르고 문을 열어주었으니, 어서 이 문을 빨리 닫고 싶었다. 아마 남편이 없었더라면 재빨리 닫아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은 남편이 집에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보통 2층에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 때도 있다. 낯선 이가 들린 그 잠깐 사이에 남편을 부를까 말까를 고민했다.
무엇보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열어준 내가 바보 같았다. 다행히도 심장이 두근거리진 않았지만 반성해야 했다.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어쩌려고...
분명 제주에는 3가지가 없다고 했다. 거지, 도둑, 대문. 우리 집엔 대문이 없다. 그래서 대문이 없는 것은 진짜다. 그런데 정말 거지도, 도둑도 없다고? 정말인지 궁금하다. 다음에 제주 토박이분들을 만나면 꼭 한번 물어봐야겠다.
잡상인이 간 후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일 년간 집에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보통 낯선 사람들은 낮에 왔었다. 그래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몇 달 전에는 마을을 관리하시는 이장님이 오셔서 마을에 제사가 있다며 집집마다 돈을 걷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몇만 원이나(!) 찬조금을 받아가셨다. 그때는 동네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사이비 종교인들이 들리기도 했다. 보통 두 명씩 짝을 이뤄 다니곤 하는데 하필 처음 온 시점에 내가 몸이 아파 누워있었을 때 와서, 문을 열려고 몸을 일으켰다가 중요한 손님이 아니라 조금 화가 날 뻔했었다(우리 집에 중요한 손님이 예고 없이 올리가 없지). 그래도 그때는 낮이었고 반투명창인 우리 집 문으로 여러 사람의 실루엣이 비췄기 때문에 "누구신가요?"하고 물어볼 수 있었다. 서둘러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그들임을 알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금방 되돌려 보낸 적이 있었다.
글을 쓰다 또 생각이 났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가끔 주말에는 방송을 하며 과일, 채소를 파는 차량이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추워진 이후로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번엔 어떤 차량이 천천히 집 앞을 지나가다가 사람이 집에 있는 것을 알고,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거실 창문(여름에는 열어놓아서)으로 말을 거셨다. 창문을 사이에 두었지만 가까이로 사람이 와서 신경 쓰이긴 했다. 본인은 쿠팡에 세제를 납품하는 업체인데 훨씬 저렴하니 하나 사시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워낙 물건을 쟁여놓고 쓰지 않는 사람이라 거절했다. 그리고 우리 식구가 사용하기엔 세제의 양이 너무 많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예전에 내가 어릴 때 아파트에 계속 살았는데, 그때는 진짜 많은 잡상인들이 아파트를 집집마다 돌며 이것저것 팔기도 했는데 그 횟수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오히려 지금은 아파트의 보안이 강화되어 못 파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이렇게 주택에 살고 보니 다시 잡상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 밤에 대체 복조리가 대체 뭐길래 나를 놀라게 했을까? 아줌마면 괜찮았을까? 그리고 가격도 비쌌다. 조금 더 싸게 파셨더라면 난 그것을 샀을까? 심지어 복조리를 안 사겠다고 하니 다른 물건도 있다고 했다. 정말로 살만한 물건이 없었다. 칫솔이 있어서 살까 했더니 지하철역에서 천 원이면 사는 칫솔이 7천 원으로 둔갑해 있었다. 결국 아저씨는 소득 없이 되돌아가셨고 나는 깜깜한 밤에 아저씨를 만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냥 뭐라도 살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날 저녁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 파는 것도 힘드실 텐데 하는 후회가 조금 밀려왔다. 그런데 혹시 몰라 지갑을 확인하니 2천 원 밖에 없었다. 결국 못 샀을 뻔했다.
앞으로 복조리만 보면 떠오를 것 같은 날
정월 초하룻날 만들어 파는 복조리를 집에 걸어두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소박한 민간신앙이라고 한다. 과연 그 복조리를 샀더라면 그래서 집에 걸어두었다면 우리 집에 복이 가득 들어왔을까? 분명 그 복조리는 사도 후회였을 테고 안 사도 후회했을 테다.
다음엔 제발 낮에 방문하시면 좋겠다. 아! 그렇다고 사겠다는 것은 아니고...
+ 글을 쓴 이후에 궁금해서 '복조리 잡상인'에 대해서 찾아보니 좋지 않은 소문들이 많았다. 아쉽다. 사주지도 않았으면서 뭘 아쉬워하냐고? 차라리 정말로 복을 주는 순수한 복조리를 팔았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