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쇼핑을 좋아했다. 예쁘고 귀여운 무엇인가를 사는 것을 좋아한 데다가 당연히 그중에 옷을 사는 것도 참즐겨했다. 그러나 엄마는 쇼핑을 즐겨하시지도 않는 데다가, 옷도 입을 정도로만 있으면 딱히 더 구매하지 않으신다. 정말 정말로 입을 옷이 없거나 혹은 필요한 옷이 생겨야만 쇼핑을 하러 가신다. 나는 한 번도 입을 옷이 없어 쇼핑을 한 적이 없고 늘 새롭고 예쁜 옷을 찾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나는 정확히 반대이다. 쇼핑을 사랑하는 딸과 쇼핑에는 관심이 없는 엄마.
그런데 시어머니는 다르다. 어머님은 쇼핑을 참 좋아하신다. 그중에서도 옷을 사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그보다 더 젊으셨을 때는 인테리어, 소품, 액세서리, 스카프, 당연히 가방 심지어 미술품까지도 사 모으셨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댁에 드나들던 시절, 멋쟁이 어머님이 좋았다. 센스 있는 옷차림, 다양한 액세서리, 멋을 아는 여자 같았다. 어릴 때부터 소박하게 꾸미던 엄마만 보던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특히 관심분야도 비슷하다 보니 어느새 "나 어머님 딸 같네?"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다.
늘 나에게 "그때가 좋은 거다, 갖고 싶은 사라, 예쁜 거 사 입어라" 말씀하신다. 보통 시어머니들은 며느리가 과한 쇼핑을 할까 봐 눈에 불을 켠다고 하던데 우리 어머님은 나를 보고 "예쁘다. 잘 사 입었네, 잘 어울린다"라고만 말씀하신다.
게다가 시댁에 갈 때마다 나에게 액세서리도 주시고, 가방도 주시고, 옷도 주신다. 물론 그 외에의 것들(특히 음식)도 많이 주셔서 가져오곤 했다.
그러니까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의 나의 모습은어머님의 딸이고,미니멀리스트로 살기 시작한 후로부터는 엄마 딸인 것 같다.
멋모르던 며느라기 시절엔 모든 것이 감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인즉슨 쇼핑을 좋아하는 어머님이 본인 옷만 사 입으시면 좋을 텐데, 남편 옷, 아이 옷 심지어 내 옷까지 사다주시니 조금 과하다 싶었다. 특히 이것은 취향의 문제였다. 60대의 어른과 30대의 나의 쇼핑 취향의 간극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심지어 아이의 옷마저 미묘하게 취향이 달랐다. 그것을 느끼게 된 후로 몇 번은 받아 들었으나 어느 순간 "어머님 저 못 입을 것 같아요" 하고 거절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옷을 사고 마음이 변해 입지 않는 옷을 "너 주려고 사 왔다" 하면서 주시는 것이 아닐까 느껴질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평소 집에서 입고 있는 남편의 옷은 체크와 줄무늬가 주를 이루는데, 그것은 남편의 취향도, 나의 취향도 아니다. 완전한 어머님의 취향이다. 무엇보다 어머님의 성의를 거절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옷을 가져와서, 입지도 않을 거면서 보관하거나 처리하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시부모님이 제주에 오셨다.어머님은 초록색 맨투맨 티셔츠를 가져오셨다. 럭비공이 그려진 귀엽고 스포티한 옷이었다. 초록색의 컬러가 나쁘지 않았다. 당장 이번 봄에 입기에도 손색없는 티셔츠였다. 분명 지난주에 사셨다 느낌이 왔다. 완벽한 새 옷이었다. "너 가질래? 혹시 입을까 해서 가져왔어" 나는 초록색 옷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가질까? 말까?" 그 찰나의 나에게 있는 맨투맨 티셔츠들이 세 개나 떠올랐다. 그리고 가을에 주로 입는 초록색 줄무늬 티셔츠도 한 개 생각났다. 그 네 개의 옷 중에 이미 세 개는 어머님께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최근에 어머님이 옷을 가져가라고 말하면 내가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또 사실 거면 가져가시고, 안사실 거면 놓고 가세요~" 생각보다 어머님은 쿨하시다. "안 입으면 가져가고~" 그렇게 그 옷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분명 그 초록색 신상 맨투맨 티셔츠는 이번에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쇼핑 수십 년 차인 나는 이제안다. 내가 사지 않은, 내 마음에 쏙 든 옷이 아니라 그냥 그저 그런 옷이 내 옷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또 이 옷을 어떻게 해야 하지 엄청나게 고민할 것을 안다. 특히 새 옷이라면 당장에 버릴 수도 없고 말이다.
미니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되면서부터 꽤 자주 옷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내가 가진 모든 옷을 정확히 알고 있다. 심지어 올해까지 열심히 입고 버릴 (이미 낡아버린) 옷도 정해있다. 그렇게 정리했더니 옷의 개수가 어마하게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늘 입는 옷은 정해져 있어서 겨우 한두 번을 입고 계절을 넘기는 옷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런데 이 옷장에 내가 사지도 않은, 심지어 내 마음에 쏙 들지도 않는 그저 괜찮아 보이는 옷을 넣어야 한다니... 특히 그랬다가는 다음에 내 마음에 쏙 든 다른 옷을 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더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일 테다.
그래서 나는 초록 맨투맨을 포기했다. 이미 지난가을에 연보라색 맨투맨을 가져와 입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가을에도 어머님의 옷방을 보고 심란했던 것이 사실이다. 왜 옷방에 비슷한 맨투맨 티셔츠가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거 입을래?" "어머님, 옷이 왜 이렇게 많아요?" 그때마다 우리 어머님 레퍼토리는 똑같다 "이제 다시는 옷 안 살 거야" 그 이야기를 몇 년 동안 듣다 보면 이제는 그냥 넘기는 말로 듣게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님을 볼 때마다 참 귀여우시다.
다행히도 남편은 어머님의 아들이 아닌지(?) 쇼핑하는 습관이 전혀 다르다. 옷을 거의 사지 않는다. 어디에 견주어도 일등 할 것 같은 엄청난 미니멀리스트이다. 심지어 내가 "옷을 제발 하나 사라사"하고 권유할 정도이다.
어머님이 옷을 사시는 것은 상관없는데 , 많이 사셔도 입으시기만 하면 상관없는데 우리 가족의 옷까지는 사지 않으시면 좋겠다. 그래도 수백 번, 수천번을 간곡히 말씀드린바 아이 옷은 사주시지 않으신다. 그래도 시댁에 다녀올 때면 가끔 남편도 아이도 새로운 옷을 입고 올 때가 있다. 물론 어머님이 옷을 사주시는 마음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래봤기 때문이다.
예쁜 옷을 보면 입고 싶고, 사고 싶고, 사주고 싶고, 입히고 싶은 그 마음 내가 제일 잘 안다. 여전히 나는 어머님 딸 같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요즘 어머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내가 뭘 사달라고 부탁드릴 때인 것 같다. 서울에 살 때는 뭐 부탁드릴 것이 없었는데 특히 제주에 살면서 팔지 않는 것들이 많으니 종종 부탁드리게 된다. 지난번에는 아이 발레 머리핀을 사달라 부탁드리며 당부드렸다. "딱 한 개만 사주세요" 그랬는데 다른 컬러로 두 개를 사주셨다. 역시 어머님이시다.
그래도 나는 어머님께 미니멀리스트를 강요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어머님의 작은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앞으로도 모르는 척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