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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Nov 29. 2021

은하수 공원에 다녀왔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전날 엄마에게서 할머니가 위독하시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다녀오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몇 달 정도 요양병원에 계셨다. 그동안은 코로나로 면회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엄마가 뵙고 왔던 할머니의 마지막 날에는 인공호흡기도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계셨고 며칠 동안 음식을 못 드셨다고 하셨다. 그렇게 그날 전화를 받고 다음날 저녁 할머니는 떠나셨다. 나는 지난 추석에도, 어제도 마지막 인사를 못 드렸는데... 아니, 모든 것은 다 핑계였다. 



내가 가까이 있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할머니 손을 잡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따뜻하게 안아볼 수 있었을까? 



할머니는 인생의 절반을 앉아서만 생활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았기도 하고 아마도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일을 하시느라, 아이를 돌보느라 몸이 성하지 않지 않으셨겠지. 그러한 여러 이유로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앉아서만 생활하신 지 45년이 넘으셨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가 앉아계신 모습만을 봤다. 엄마의 결혼식 사진을 보면 그때는 서계셨는데, 그 후로는 서있는 것도 힘들어하셨다고 했다. 아빠와 엄마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걷지 못하셨다. 그렇게 앉아서만 45년을 사셨다. 꼭 필요한 외출을 제외하곤 집에만 계셨다. 그 이후로는 할머니를 삼 형제가 돌아가면서 모셨다. 



처음엔 큰아버지가 모시고 살았고 그다음은 둘째인 우리 아버지가 모셨고, 잠깐 스치듯 작은 아버지가 모셨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거쳐 다시 큰 아버지 집으로 가셨다. 그 긴 시간 동안 할머니는 절대 혼자 사실 수 없었다. 도와주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릴 때는 우리 집에 계셨는데 난 언제나 할머니 곁에서 잔 심부름을 도맡아 했고 할머니의 대소변도 받을 때도 간혹 있었다. 물론 머리가 점점 크고 나선 할머니의 부름을 귀찮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꼭 할머니 침대 아래에 이불을 펴고 잤다. 그리고 등교했다가 아주 빨리 귀가했다고 했다, 할머니가 날 기다리실까 봐.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어린시절, 할머니가 우리 집에 계셨던 기억은 몇 개의 조각으로 남아있다. 



우리 할머니는 언제나 인정이 넘치시는 분이었다. 할머니에게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는데 본인이 하실 수 없으니 심부름을 아주 많이, 정말 정말 많이 시키셨다. 할머니가 움직이지 못하시니까 우리는 할머니의 수족이 되어 심부름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에겐 9명의 자식이 있었기에 손자, 손녀들도 아주 많았다. 가끔씩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심부름을 하곤 했다.



할머니이 장례식엔 모든 가족이 모였다. 그래도 가끔 있는 행사에 모든 어른들을 뵙곤 했지만 그 자녀들(나의 사촌들)까지 모두 다 만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할머니에겐 5명의 딸과, 3명의 아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자녀들은 18 명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거기에 사위, 며느리, 증손자, 증손녀까지 합쳐지니 정말 대가족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발인을 따라갔는데 정말 정말 많은 인원이 산을 올랐다. 그 순간 할머니는 마치 한 마을의 족장 같은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많은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을 하나하나 알뜰살뜰히 챙겨주셨다. 몇 년 전 나는 결혼식 며칠 전에 피로연을 했었는데(인사드릴 가족이 많아서) 할머니가 직접 케이크를 주문하시고 꽃바구니를 준비해서 와주셨다. 80세를 훌쩍 넘으신 할머니가 주문해주신 케이크와 꽃다발은 정말 예뻤고, 감동이었다. 그 후에 내가 아이를 낳고 친정에 몸조리를 하고 계시던 때도, 할머니는 고모들을 에게 토종닭 한 마리와 봉투를 준비하셔서 보내주셨다. 할머니는 직접 오실 수 없었으니까...




할머니가 보내주신 꽃바구니 / 사랑하는 손녀에게




결혼 전엔 늘 할머니와 함께 명절을 보냈는데, 결혼 후에는 나에게 시댁과 친정이 있기에 찾아뵙는 일이 적어졌다. 그리고 계속 해외생활 중이어서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한참 후인 작년, 어버이날에 할머니께 아이를 데리고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그동안 아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했다. 아이는 이제는 많이 커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고, 그리고 아주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를 무섭게 바라만 보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했다고만 말씀하셨다. 왜 이제야 왔냐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온갖 핑계로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다. 








우린 그 장례식장이 3번째였다. 정확히 말하면 난 같은 장례식장, 같은 위치의 그곳을 세 번째 방문했다. 6년 전 큰 아버지, 1년 전 작은오빠, 그리고 엊그제 할머니가 그곳에, 같은 위치에 누워계셨다. 



할머니는 아주아주 오래전에 딸을 먼저 떠나보냈고 6년 전 큰 아들을 떠나보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리고 작년에 작은 손자를 떠나보냈다. 나에게도 37살의 청년이었던 오빠를 떠나보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빠를 보내고 오는 길,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갔었는데 할머니가 누워서 가슴을 치며 울고 계셨다. 그 일은 정말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슬픈 기억이다. 그리고 1년 후 할머니가 하늘로 가셨다. 



할머니는 지금 행복하실 것 같다. 향년 91세. 이미 이승에서는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가셨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큰 아들과, 딸, 그리고 작은 손자까지 다시 만나 웃음 지으며 그곳에서 계실 것 같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원하는 만큼 걸어다니며, 건강하게 그곳에서 더 행복하실 것이다.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그것 말고는 나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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