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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Jan 20. 2024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

새벽같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서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온기가 훅 느껴진다. 제주에서는 가끔 밖에 느낄 수 없었던  온기가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진다. 친정엄마께서는 "집이 좀 춥지?" 하면서 보일러 온도를 높이신다. "엄마 하나도 안 추워요. 이 정도면 여름 같아요"라고 말한다. 오랜만에 따뜻한 집에 도착해서 아이도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양말도 신지 않고, 조끼나 잠바를 걸치지 않은 채 집을 활보한다.



저녁을 먹고 양치를 하고 세수하고 잘 준비를 하려는데 수돗물을 틀자마자 따뜻한 물이 나온다. 늘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얼굴도  이도 너무 시렸는데... 발을 닦으려고 해도 찬물부터 나와 늘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물을 틀자마자 따뜻한 물이 나와 발을 닦고 나니 왠지 감동이다.



설거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차가운 물부터 나오니 한참을 몸을 씻고 난 후에 남은 열로 설거지를 하거나, 아니면 보일러가 돌아가는 때에 맞춰 설거지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언제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보니 설거지할 맛이 난다. 찬물에서 잘 닦이지 않는 접시를 보며 한숨 지고는 했는데 설거지가 아무리 많아도 끝날 때까지 뜨거운 물이 나오니 불안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설거지를 싫어한다기보다 차가운 물에 설거지하는 순간이 싫었던 것 같다.



늘 당연하다 생각했던 뜨거운 물, 따뜻한 방안... 이런 것들이 새삼스럽게 감사하게 느껴지니... 참 달라졌다. 부족한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몰랐을 삶이다.  








언젠가부터 진짜 부자는 겨울에 반팔 입고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댁에 오니 다른 의미로 나는 진짜 부자가 되었다. 반팔과 칠부바지를 입고 오가다 보면 덥다고 느껴질 지경이었고, 잠잘 때는 반팔을 그대로 입고 잠을 자면 된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잠을 잘 수 있다니!!! 엄청나지 않은가! 제주 우리 집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다.




내가 사는 주택의 겨울은 등유를 가득 넣고 보일러를 돌리고, 온열기를 필수로 틀어놓는다. 도시의 아파트에 비해 전기세와 기름값을 몇 배로 더 내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따뜻하진 않다. 결코 따뜻하지는 않고 그냥 살짝 추위가 가신 수준이다. 내가 가진 가장 두꺼운 옷을 겹겹이 겹쳐 입고, 수면양말, 실내화는 반드시 신은 후에 따뜻한 보온주머니를 하나쯤은 안고 있어야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삶을 살다가 잠시 도시로 와서 따뜻하게 지내고 나서야 이 전의 내가 모르던 감사함을 느끼고,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지냈었는지 깨닫게 된다.




낭만의 겨울은 이제 안녕...







나는 언제나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쳐오면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런 내가 아이를 낳고도 수년이 지나도 제자리인 것에 절망했다. 심지어 마흔을 목전에 두고도  진짜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좌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주택의 겨울을 겪으며 조금은 어른에 근접해진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북극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함을 7포인트 정도는 얻게 되지  않았을까. 덕분에 나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주에서의 겨울이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나는 겨울, 추위, 매서움, 불편함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동안 내게 주어진 조건은 언제나 당연하다 생각할 정도로 풍요로운 것들이었는데, 지금에서 겪고 보니 세상에 그런 것은 없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절대 없다.




그럼에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번의 겨울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감사함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몸으로 직접 부딪혀 본 것이, 머리로 깨닫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기억에 남을 테니 나는 영원히 이 감사함을 장착한 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조금 더 소박하고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이 감사함을 기억한 채로,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었음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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