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지 알았다. 엄마가 절대 뭐든 안 사주셨기 때문이다. 살았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냥 중산층 정도였는데, 뭐든 잘 사주시는엄마가 참 이상했다. 어렸으니 뭘 특별히 값비싼 것을 사달라고 그랬던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 우리 아이가 뭘 사는 것을 보면 나도 어렸을 때 저렇게 뭐든 갖고 싶어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대체 왜 그렇게 사주지 않으셨을까?
아무튼 엄마가 그중에 가장 사주지 않았던 것은 옷이었다. 내가 성인이 되어 한때 버는 돈으로 미친 듯이 옷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엄마가 옷을 그토록 사주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진짜 어렸을 적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시절에 얼마나 옷을 사주지 않던지, 혹은 어찌나 넉넉한 옷을 사주시던지 언젠가는 한 번은 몇 년 정도 입을 만한 넉넉하다 못해 커다란 코트를 사줬던 기억이 있다. 그 코트는 정말 몇 년을 입고 또 입으니 딱 맞았었다. 나중엔 그 옷을 너무 오래 입어 지겨워져서 버렸다. 아직도 기억난다. 초록색과 빨간색 무늬가 겹쳐진 떡볶이 코트. 그 이후로는 떡볶이 코트를 살 생각을해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초등학생 때에는 그럭저럭 지냈던 것 같다. 사실 그 나이만 해도 내가 입는 옷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학년이 되며 친구들이 입은 옷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까지도 그냥 엄마가 사주는 아무 옷이나 주워 입다가 드디어 엄마에게 말했던 것 같다. "엄마 저 갖고 싶은 옷이 있어요. 옷 사러 가요"
이게 웬일? 아마도 처음 옷을 사달라고 해서였을까? 엄마는 정말로 나를 데리고 시내로 갔다. 내가 살던 지방에는 시내라는 곳이 있었다. 시내의 몇몇 매장에는 그 당시 최신 유행하는 패션의 옷을 파는 곳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을 들어갔다. 나는 친구들이 입었던 옷을 기억해 내고는 그것들로 골랐다.
아직도 그때 산 옷이기억에 난다. 내가 최초로 골랐던 옷이었기 때문이다. 엘머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와 티니위니가 작게 그려져 있던 수건재질로 된 세트를 골랐다. 주말에 그 옷을 사고 바로 월요일에 입고 갔다. 친구는 컬러만 다른 엘머 티셔츠를 갖고 있었다. 그 옷을 입고 온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봤다. 지금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다. 같은 디자인 말고 다른 걸로 살걸 그랬다. 이미 늦은 일이었다.
뭐 할 수없지.. . 암튼 그 옷이 닳도록 입고 다녔다. 그 정도로 열심히 입고 다녔으면 또 사줄 만한데... 그 이후로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옷을 잘 사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옷에 대한 집착이 점점 커져갔던 것 같다.
엘머 얼굴만 크게 그려져있던 티셔츠가 기억난다
그렇게 살고 있던중학생이 된 어느 날, 엄마가 먼저 옷을 사러 가자고 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 옷을 사러 가자고??진짜야??"
정말로 의심스러웠다. 그동안 엄마가 옷을 먼저 사러 가자고 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굉장히 신나는 마음으로 엄마를 따라 쇼핑을 나섰다. 물론 그렇다고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청 기뻤다. 함께 쇼핑몰에 가서 체크 남방, 흰 티셔츠, 베이지색 반바지까지 세트로 야무지게 사 왔다.
새옷을 입고 얼마나 좋았으면 매일입고 다녔다. 세탁해서 입고 또 입고... 지금 생각하니 넘 구질구질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학원을 다니던 남자애가 그랬다. "넌 옷이 그것밖에 없냐?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냐"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썸을 타고 있던 사이였던 것 같다. 젠장... 그래도 그 후로도 옷이 정말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입고 다니곤 했다.
아무튼 그것보다 내 기억에 엄마가 먼저 선뜻 옷을 사준 것이 처음이라 물어봤었다. "엄마그때 갑자기 옷을 왜 사준 거야?" 하고 물어봤었다. 그랬더니 엄마가 주식으로 무려 100만 원이나 벌었다고 했다. 그때가 20년 전즈음이니까 그래도 지금 기준 300~500만 원은 번것이 아닐까?
그 이후로 엄마는 주식왕이 되었다... 라는 아름다운 결말을 쓰고 싶었지만 그냥 꾸준히 주식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엄마는 그렇게 아끼고, 조금씩 벌어서 부자가 되었다. 언제든 우리가 원하면 옷을 사주고, 밥을 사주고, 커피를 사주고,그리고 해외여행을 보내줄 수 정도의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성인이 되어보니, 엄마가 그때 옷을 안 사줬던 이유는 정말로 생활비를아끼기 위해서도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엄마는 쇼핑을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원체 쇼핑을 안 하던 사람이라 아이가 옷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사고 싶은지, 왜 그런 쓸데없는 것을 사달라는지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는 엄마가 돈을 벌지 않는 전업주부였기 때문에 우리를 매번 쇼핑시켜 줄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사치할 여유가 없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엄마가 처음으로 주식을 해서 번 돈으로 기꺼이 우리에게 옷을 사줬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얼마 전 친정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었다. 지금도 평상시의 엄마는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꼭 나를 만나면 쇼핑을 하러 가자고 한다. 어릴 적의 나 같다. 고등학생, 대학생 즈음의 나는 엄마가 주말에 여유가 생겨 집에 있을 때마다 제발 쇼핑을 가자고 졸랐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엄마는 못 이기는 척 '구경만 하러 가겠다'는 나를 데리고 가끔 쇼핑몰에 가주고는 했었다.
이번 쇼핑에 엄마의 니즈는 정확했다. 남방과 시원한 바지를 갖고 싶어 하셨다. 제주에서 온 바쁜 나에게 쇼핑이라니... 제주에서도 쇼핑을 하지 않는 나에게 쇼핑이라니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못 이기는 척함께 갔다.
쇼핑몰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입어보시더니 이게 딱이라고 하셨다. 엄마가 계산하기 전에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아니야~ 엄마가 계산할게~" "아냐~ 엄마 내가 사줄게"
점원이 내 카드를 받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계산했다. 엄마는 나를 보고 옷울 하나 사라고 하면서 아까내가 마음에 든다며 입어본 옷을 계산해주려고 하셨다. 나는 이제 충동 쇼핑은 잘하지 않는 편이라 사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훈훈한 마무리였다.
드디어 엄마 옷을 마음껏 계산해 주는 어른이 되었다. 기분이 좋았다.
돈을 벌면서 제일 기뻤던 날은내가 번 돈으로 효도를 할 수 있을 때였다. 그날처럼 말이다.
평생 전업주부였던 엄마가 처음 번 돈으로 아이들의 옷을 사줬던 것만큼, 나도 그렇게 돈을 벌어엄마가 필요한 것을 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핸드폰이 고장 나면 새것으로 바꿔드리고, 안마기가 필요하면 사드리고,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새것으로 바꿔드리고, 새 옷이 입고 싶다고 하시면 척척 사드리고... 그런 효도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직 돈을 많이 벌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는 부모님들께 효도할 정도는 벌고 싶다. 역시 그러려면 많이 벌어야겠다. 앞으로도 힘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