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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Jan 14. 2022

밤마다 한잔씩

어제 있었던 사건은 실로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 일이었다. 얼마 전 오셨던 부모님 덕분에 집에 '한라산 소주'가 17도, 21도 도수마다 구비되어 있지만 용기 없는 애주가는 차마 소주를 꺼내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밤이 되어 한잔씩 술을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 봤자 내가 겨우 마시는 술이라고는 과일맥주, 3도씨의 아주 약한 술이다. 처음엔 그래도 술이라 알딸딸해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그랬는데 이제 워낙 자주 마시니 마치 음료수를 마시는 기분이다.(굉장히 술꾼 같은 발언이군)



어제 나는 오후 2시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탕수육과 간짜장, 짬뽕까지 오랜만에 굉장히 호화스러운 식사였다. (다행인 건 나는 반주는 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한 나는 이 배부름이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역시 저녁까지 배가 꺼지지 않아 식사를 안 하고 건너뛸 수 있었다. 그런데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고 야심한 시각이 가까이 오니, 자꾸 입이 심심해지고 배가 고파오는 것이다.(이것 또한 예상했다) 기어이 자기 전에 소파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맥주를 땄다. 캔맥주를 딸 때의 그 경쾌한 소리, 그리고 한 모금 딱 마시자마자 흘러드는 달콤한 맛은 밤마다 찾아오는 엄청난 유혹이다!(난 절대 이것을 이겨낼 수가 없다)








나는 와인도 참 좋아한다. 그러나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기에 나 스스로 겉멋이 들었나 싶기도 할 때도 있다. 단지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왠지 건강을 생각하며 마실 수 있으니까?(하하하!) 그리고 도수가 세서 조금 마셔도 취한 기분이 드니 맥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배가 부르지 않아 좋아한다. 그리고 와인도 역시 워낙 종류가 많은 터라 아주 가끔 고르고 골라 한 병씩 사는데, 우연히 내 맘에 드는 맛을 찾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 분명 와인의 가격이 비싸지 않았는데 내 마음에 들면 더 신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와인의 가격은 맛에 비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와인 한 병은 혼자 마시기엔 양이 많아 사는 것이 늘 망설여진다.(남편은 오직 맥주파이다) 물론 종종 와인을 충동구매할 때가 있긴 하다. 그런데 꼭 와인을 구매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가 있는데 바로 집에 손님이 오신다 할 때이다!(이때 그들의 술 취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와인을 함께 나눠마시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와인을 마음 놓고 사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 친구가 제주에 놀러온다길래 부푼 마음을 갖고 함께 마실 와인을 사다 놓았다. 치즈도 종류별로 사다 놓았는데 애석하게도 친구는 피곤하다고 먼저 잠이 들었다. 그래서 그 와인을 바라만 보며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이 동하여 혼자 병을 열어 마시기 시작했다. 마치 부엌에 딸린 창고의 온도는 마치 와인셀러의 온도 같아서 (그냥 늘 서늘하다, 요새는 춥다) 거기에 놓고 두고두고 며칠을 하루에 한잔씩 마셨다. 아이를 재우고 나와 책을 읽으며 혹은 작은 화면을 앞에 놓고 한 모금씩 마시는 순간은 나에겐 참 행복이었다. 그래, 이 한 잔이면 충분하지. 




언젠가 뉴욕에서 마셨던 와인 한 잔.








반면에 소주는 가족 모임을 가질 때 아빠와 함께 마시는 술이다. 그래도 소주는 도수가 너무 높아 딱 한 잔,  진짜 많이 마셔도 세 잔을 겨우 마시는데, 한 잔만 마셔도 곧 내 얼굴은 피를 토하는 것처럼 빨간 얼굴이 된다. 그리고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빨개지는 것이 마치 빨간 사람이 돼버리는 것이다. 이때 가족들이 내 얼굴을 보게 되면 '대체 얼굴이 또 왜 그래' 하며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제야 나는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또 이렇게 빨개졌구나 하고 놀라고 만다. 소주는 평소에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 아니, 마실 수가 없다. 어쩌다 한 병을 연다고 해도 혼자서는 절대 마시지 못할 강력한 맛이라, 소주를 한 잔 딱 마시고 싶은 날도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드라마를 보다가 소주에 관한 명장면을 찾았다. 드라마 '고백 부부'에서 민서영역의 고보결 씨 배우분께서 찬장에 소주 한 병을 숨겨두고 머그컵에 가득 따라 원샷하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다.(물론 드라마라 소주가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마신 후에 그날의 스트레스를 바로 날려버리는 것을 보니 자꾸만 나도 따라 해보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장면인데 아마 따라 하다가 응급실에 실려갈까 봐 무섭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처럼 아주아주 힘든 날이 오면 눈 감고 소주 한 병이 원 샷 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제주는 역시 한라산 소주





오늘 저녁, 나는 한라산 소주를 참아내고 보통 때 마시던 술을 마시고 있다. 이 술을 마시고 있자니 어릴 적 아빠가 종종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오던 밤들이 생각난다. 어쩌면 아빠가 한창 술을 드시던 그 나이를 내가, 우리가 지나고 있다. 아빠는 왜 그렇게 술을 마실까 어린 마음에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 나이가 들어 술을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든다. 역시 어른으로 사는 일은 쉽지 않았구나.











메인 이미지 출처 :  Design by png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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