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감기에 걸렸다. 제주에 내려오며 한 달에 한 번씩 감기에 걸려있다. 이상하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이곳에 살면 감기 따윈 평생 걸리지 않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고 제주에 내려왔다니...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무튼 감기에 낫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뜨거운 국물이 있는 식사를 하는 것, 그리고 수시로 따뜻한 차를 끓여마시는 것이다.
요즘은 겨울이라 더욱 그러하지만, 매일 우리 집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것은 커피머신도 아니고 밥솥도 아니고 전기포트일 것이다. 겨우 물을 끓이는 것 외엔 다른 용도는 없는데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지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물을 가득 채워놓고 끓인다. 뜨거운 물이 필요한 때라면 언제든 쓰고 있다. 요즘 전기포트는 성능이 좋아 원하는 온도에 맞춰 물을 끓여준다. 종종 차를 마시려고 할 때, 차 포장지에 85도, 93도라고 적혀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에 맞춰서 물을 끓이면 되니 더 유용한 것 같다.
차를 마시려고 전기포트에 물을 보글보글 끓이고 있는데 남편이 거실로 나온다. "차 마시려는데 한잔 줄까?"라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설 명절에 서울에 잠시 다녀온 남편이 말하길, 서울은 밖이 너무 추운데 집안은 정말 따뜻하고, 제주도는 밖은 그래도 서울보다는 따뜻한데 집안이 너무 춥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추위를 견뎌야 하는 겨울의 제주 주택생활.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따뜻한 차가 필요하다.
요즘은 주로 과일청으로 된 차를 마신다. 원래 향이 좋은 티백으로 된 차를 주로 우려 마시곤 했는데 제주에 와서는 특별히 따뜻한 과일차를 주로 마신다. 달달한 과일청에 뜨거운 물을 넣고 휘 휘 저어주고 한 모금 마시면 그 달달함에 몸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오늘의 선택은 모과차와 유자차이다. 요즘 나는 주로 모과차를 마신다. 그동안 맛있는 모과차를 찾지 못해서 즐겨마시지 못했는데 제주에 와서 우연히 사게 된 모과차가 딱 내가 원하던 그 맛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모과차를 좋아했다. 엄마가 모과를 잘 잘라서 담가놓은 모과청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마시면 얼마나 맛있었는지, 특히 모과 특유의 향기가 너무 좋았다. 모과는 철이 되면 그릇에 담겨 거실에 올려져 있곤 했다. 집안으로 들어갈 때 나던 그 향긋한 모과향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아빠 차 안에도 종종 모과가 있곤 했다. 생각해보니 자연 방향제인 샘이다. 모과차를 마시고 있으면 꼭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모과차 한잔
남편에게는 유자차를 타 주었다. 남해에서 잘 키운 유자로 담근 청이라고 라벨에 적혀있었다. 겨울에 유자차는 우리 집 필수템 같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대중적인 유자차 브랜드가 있는데, 다른 곳은 너무 달고 뭔가 인위적인 맛이 나는데 이 것만큼은 언제나 믿고 마시는 듯하다. 내가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겨울이 되면 남편이 유자차를 큰 병을 사 오곤 해서 자연스럽게 마시게 된다. 남편에게는 어떤 차를 타 줄까 물어봐도 늘 유자차라고 말한다.
이번에 제주 집에서는 새로운 과일청 차를 샀다. 바로 자몽차이다. 아이가 카페에 같이 가면 자몽차를 주문하곤 하는데, 아이에게 주기 전에 얼마나 뜨거운지 확인해야하니 그때마다 한 모금씩 마셨는데 상큼하니 맛있었다. 그리고 한참 브랜드 카페에서 나왔던 자몽 허니 블랙티가 참 맛있었는데 이것을 집에서도 만들어 마시고 싶어서 자몽차를 주문해 봤다. 인터넷에서 자몽차를 검색하다가 상품평이 제일 좋은 자몽차를 주문했는데! 나는 원래 이런 것을 살 때마다 주로 실패에 가까운 구매를 하고 마는데 이번 것은 대 성공! 정말 정말 맛있었다. 카페에서 팔던 그 자몽차와 똑같은 맛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1kg짜리 자몽청을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어서 재주문을 해야겠다.
따뜻한 자몽차
지난번 감기에 걸렸을 때 배, 도라지, 생강이 모두 함께 들어있는 청을 발견해 주문해 보았다. 그런데 역시 욕심이 과했다. 보통 생강차라던지 도라지, 배가 함께 들어있는 청을 따로 마셨었는데 이번에는 3가지 한꺼번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맞춤이다 싶어서 사게 되었는데 너무 달다. 몸이 베베 꼬일 정도로 달아서 손이 가지 않는다.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주문한 차인데 너무 달아서 내가 꿀차를 마시고 있는 건지, 배도라지 생강차를 마시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이제는 냉장고에 보관에 있는 병만 봐도 너무 달아 보여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아깝다. 제일 비싼 과일청이었는데... 차마 버릴 수는 없으니 다음번엔 여기에 인삼이라도 넣고 끓여 마셔볼까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냥 따로 분리된 차를 주문해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차를 마시는 패턴은 이러하다. 낮엔 주로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저녁에 아이를 재운 후, 나도 모르게 잠들었던 몸을 간신히 일으켜 거실로 나와 테이블에 앉는다. 켜켜이 쌓인 피로와 잠을 이겨내느라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전기포트에 물을 끓인다. 냉장고를 열어 어떤 차를 마셔볼까 고민하다가 선택한다. 선택한 차의 청을 조금 덜어 컵에 넣어놓고 끓인 물을 부어서 휘휘 저어 의자로 가서 앉는다. 오늘의 차와 함께 선택된 책을 한 장씩 두장씩 넘기며 차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셔본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며 밤의 2부가 찾아오는 순간, 나는 다시 새로운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