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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Sep 12. 2023

6. 감나무와 시간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제법 서늘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다 25도 젖힌 목덜미가 만든 시야에 언뜻 나무가 보였다. 도심 빌딩 사이 외롭게 서있는 감나무. 노래진 나뭇잎 사이에 조그만 감들을 매달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어색하게 서있 감나무는 창백한 노란색 잎새를 미세하게 들썩이며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떨고 있다. 


내가 고개 들지 않았으면 존재를 몰랐을 꽤 큰 생명체. 감나무는 무관심 속에서도 해마다 작은 열매를 계속 세상에 내보내고, 인간들은 시종 무관심 속에  고개 숙이고 살다가 거기에 감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렇게 땅에 묻혀 덧없이 흐르던 세월을 마감할 것이다.

 

퇴직을 앞두고 중요 업무에서 물러나고 후배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지금. 새삼 세상의 무관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간 내 성격은 타인의 관심을 받기보다는 조용히 내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틀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한다. 백과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홀로 살 수 없으며, 사회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이라는 의미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동물의 일원인가 보다. 주변의 연락 없이 조용한 날들이 흘러가면 가끔 휴대폰을 꺼내 들어 지인들의 연락처를 뒤적인다.


길거리를 걷다가, 지하철을 이용하다, TV를 보다가 외롭게 멍하니 앉아있는 노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내가 요즈음은 감정이 이입된다. 주변의 친인척, 친구, 지인들이 생을 달리하고, 자식들의 연락은 끊기고, 자잘한 병들은 육신을 괴롭히는데 시간은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하염없이 흐르는 상황을 느낌 없이 마주하는 모습이 아닐까.


그러나 이 또한 자연현상의 일부가 아닐는지. 동물 군락의 우두머리로 살가다 나이 들어, 새롭게 출현한 젊은 우두머리에게 처참히 밀려나 구석에서 외톨이로 살아가는 모습과 흡사하지 아니한가. 그렇게 자연은 한 바퀴 돌아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한 바퀴가 또 돌아간다.


간이 흘러 그 누구도 나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할 즈음 감나무는 창백한 노란색 잎으로, 작은 열매로 푸르르 떨며 도심 한쪽 구석에 또 그렇게 서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다시 한번 감나무를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오래되어 변색된 족보 구석에 새겨진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이름과 그 이름 한참 뒤에 새겨질 나의 이름을 후손들이 휙 스쳐 지나며 바라보듯이.


안녕... 또다시 시작되는 시간들에 묻혀 사그라 나의 시간들. 어색한 도심에 서있는 감나무처럼 이파리를 부르르 떨다가 간신히 작은 열매 두어 개 내어 놓고 모두의 무관심 속에 잠잠히 침잠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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