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한 현실을 피하고 싶어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니누군가 잡아끌듯 깜깜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침잠해 간다. 가슴은 보이지 않는 무거움에 짓눌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눈을 뜨지 않으면 곧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하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도통 눈을 뜰 수가 없다.
그날은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책상에 흩어져 있던 서류들을 대충 정리하고 일찍 퇴근했다. 여러 상념이 얽히고설켜 집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른다. 조용히 집에 들어온다. 아내가 평상시와 같이 반갑게 맞이한다. "잘 지냈지?"라는 문장을 뒤로하고 대답 없이 방문을 연다. 풀썩 침대에 누워 스르르 눈을 감는다.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 무력함을 느껴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아무도 눈에 보이게 비난하지는 않지만, 무언의 비난과 깔봄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1년의 성과가 발표되던 날. 내가 맡은 조직의 성과가 최하위다. 직장인의 큰 바람 중 하나인 승진을 이뤄내곤 자신감에 넘쳐 지냈던 활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나의 무능함에 치를 떨다, 슬며시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한참을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 주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외톨이로 살았다.
인생에는 부침이 있다. 바다를 떠도는 빈 병처럼 파도의 들고 남에 따라 잠겼다 떠오르기를 계속한다. 인생을 살아내면서 수많은 부(浮)와 침(沈)이 발생하고, 그때마다 희비가 엇갈리며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간다.
한번 심하게 무력감으로 침잠했던 경험을 한 뒤론 제법 인생을 달관하는 법을 배웠다. 때문에 나 같은 경험을 뒤늦게 하는 후배들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되어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그러한 압박을 벗어나지 못했다. 밀려드는 절망감을 이겨내지 못하고여러 질병으로 세상을 먼저떠나고야 말았다는 슬픈부고들에 가슴이 아팠다.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 지었네. 내일 또 만나"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와 자주 나누는 대화다. 요즈음. 오늘을 잘 보내고 새로운 내일을 맞는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언제, 무슨 연고로 나의 부고를 띄울지 모르겠지만, 부침에 편안히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샌가 바닷가 황금빛 모래사장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햇빛 찬란한 모래에 몸박고 지내다가 어느 날 지나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어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의 부고는 동료들의 부고보다는 아름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