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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 때면

by oj

이제 곧 장마가 시작인가 보다.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창문을 바라보며 시원스런 빗소리를 들으면서 집에 있을 땐 괜히 센티해진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김치전을 부쳐먹으면서 영화를 본다면 금상첨화이다. 습기가 찬 집안과 눅눅한 빨래는 제습기 덕을 많이 본다.


문제는 외출시이다. 비가 오면 너무 번거롭다. 일단 우산을 챙기는 것도 주룩주룩 비맞고 걷는 것도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고, 비 오는 날 운전 역시도 예전에 경미한 사고 경험이 있어 왠지 꺼려진다. 특히 여행갈 때 만난 비는 정말이지 불청객이다. 다행인 건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때마다 날씨가 한몫 해서 큰 불편함을 겪지 않았다. 여행 때면 고맙게도 맑은 날씨가 받쳐주었다. 흐린 날씨나 비가 와도 도착해서 내리면 기가 막히게 개인 날씨를 경험한다. 가끔은 날씨 요정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아이들과 여행 후에 오는 길에 잠시 수덕사에 들른 적이 있었다. 부슬부슬 내린 비 오는 산사는 고스넉하고 운치 있었다. 비 맞은 나무들과 산새들 소리, 개울물 소리가 어우려져 평온 그 자체였다. 대웅전 앞에 이르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맞은 편 산 위로 낮게 낀 구름의 모습은 마치 그림 같아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릴 때 비에 대한 추억도 많다. 비가 오면 아버지는 항상 우산을 갖다주셨다. 엄마는 집에 있는 누군가에게 시키셨다. 예를 들어 동생이 일찍 온 날은 언니 우산을 갖다주라고 하던지, 언니가 일찍 온 날이면 동생 우산을 갖다주라던지 했지만 아버지는 꼭 직접 오셨다. 그 사랑은 손자들에게도 이어져서 우산은 할아버지 담당이였다. 일하는 딸들을 위해서 초등학교 앞에 서 계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뭉클한 감동은 아이들에게도 있다. 아이들은 우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앞 작은 분식집에서 컵 떡볶이며 여름이면 슬러시를 꼭 먹는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들은 비 소식이 있을 때 우산 챙기라는 말을 일부러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찬스를 쓰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도 비가 올 때면 우산을 가져다주신 아버지가 몹시 그리워진다.


한 번은 중학교 때 비가 몹시 왔는데 아버지가 안 계신 날이었는지 아무도 우산을 안 가지고 왔다.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비를 맞고 가기로 했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니 옷은 금방 젖었지만 친구들과 깔깔거리면서 한바탕 통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많은 비를 맞은 건 처음이었다. 지금처럼 산성비 걱정도 안했을 때이고, 겨울이면 고드름을 따먹던 시절이었으니깐. 어차피 젖었으니 뛰지도 않았다. 운동화까지 젖은 몸은 물을 먹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했지만 기분은 왜 좋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일탈을 한 기분이랄까.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텐데 별탈없이 지나가길 바란다. 며칠 전에도 경남쪽에 내린 비로 떠내려가는 자동차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모녀가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마다 장마나 태풍, 폭우가 지나가면 한 번씩은 큰 불상사가 찾아오는데 올해는 아무쪼록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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