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아이들이 떠나기 일주일전 이모들과 사촌들이 모여 연말모임 겸 송별파티를 했다. 항상 시끌벅적한 대식구 모임에 익숙해진 우리 가족은 모일 때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은 확실히 밝은 이모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우울해 보이셨다.
다들 민준이와 형준이 적응 잘 하라고 격려해 주시고 필요한 거 준비하라고 용돈도 주셨다. 솜씨 좋으신 이모부가 곧 떠나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해 깐풍기와 탕수육. 찹스테이크와 스파게티를 직접 요리해주셨다. 막내 이모가
“형부는 못하는 게 없으시니 언니랑 애들은 좋겠어요. 언제 이런 요리를 배우셨대요. 두 애들 덕분에 근사한 요리를 다 먹네요. 아이들은 평생 잊지 못할 요리겠어요. 우리 남편은 뭐하나 몰라. 요리에는 통 관심도 없으니 말이에요”
실제로 아빠는 못 하시는 요리가 없으시다. 봄이면 매실을 담그시는 분도 아빠시고 딸기잼을 만드시는 분도 아빠시다. 엄마가 주로 해주는 한식 요리도 맛있지만 아빠는 스테이크. 깐풍기. 스파게티 등 특별 요리를 잘 하신다. 엄마 생일이면 꼭 미역국을 끓여주시는 아빠를 막내 이모는 늘 부러워하셨다. 막내 이모부는 아이들이 셋에 이모가 매일 일하시느라 바쁜데도 대식구 식사 준비도 이모 혼자 다 하고 커피까지 갖다줘야 마신다고 자주 투덜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나마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로 설거지를 정해 집안일을 돕는 착한 사촌 동생들 덕분에 산다고 하시며 늘 밝은 모습이 보기 좋은 막내 이모시다.
우울해 보이는 엄마에게도
“언니, 걱정 마, 민준이는 의젓하잖아. 잘 할 거니까 걱정 말고 고모가 어련히 잘해 주실까?”
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주고 계셨다. 큰이모와 우리 엄마도 옆에서 거들면서
“어련히 잘 할까. 걱정 말어. 네가 자주 가면 되잖어.”
민준이 이모는 우울한 목소리로
“우리 아이들 잘 있다가 오겠지? 영어가 뭐라고 내가 괜한 짓 한 건 아닐까? 아직 어린 애들인데...”
하시면서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그 때 내 마음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모, 지금도 안 늦었어요. 보내지 마요. 민준이는 여기서도 잘 할 거라구요!’
눈물을 보인 엄마가 걱정이 됐는지 민준이는
“엄마, 나 벌써 5학년 되니까 걱정 마. 형준이는 내가 잘 챙길게. 고모도 계시고 엄마 아빠도 온댔으니까 기다릴게. 전화도 자주 하고 화상 통화도 하면 되잖아. 걱정 말아요. 우리 엄만 맘이 너무 약해서 큰일이라니까!”
역시 민준이다웠다. 어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돌을 얹은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고 가기 싫다고 우울해 했으면서...마음은 그게 아니면서도 이모를 위로하고 있는 민준이다.
집으로 오면서 엄마는 민준이를 또 칭찬했다.
"만약 지욱이 혼자 가라면 울고불고 난리났을 텐데 지욱이는 참 침착해. 진짜 대견해."
하시면서 말이다. 지욱이랑 같이 가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사실은 낯선 나라에서 잘 지낼 자신은 없다. 엄마 옆을 한시도 떠나본 적도 없는데다 난 어릴 때부터 겁쟁이였으니까. 오늘 밤 민준이가 잠을 잘 잘지 모르겠다. 내 맘도 이렇게 심란한데.
공항으로 가는 차안은 무겁기만 했다. 비행기 타는 민준이가 부럽기도 하고 나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가족들과 떨어지면 어떤 기분일까 정말 자신이 없을 것 같았다. 민준이처럼 씩씩할 수 있었을까. 민준이가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할까 걱정도 되지만 민준이 없이 잘 지낼 자신 없는 내가 새 학기에 친구들과 잘 사귈지 고민이 있을 때면 누구에게 털어놓을지 솔직히 내 걱정이 먼저 앞섰다.
이모는 민준이, 형준이 손을 꼭 잡고 이모부는 말없이 운전만 하셨다. 내가 앞자리에 타고 뒷좌석에 앉은 이모 품에서 형준이는 편안히 안겨 있었다.
“형준이 형 말 잘 들을 거지? 엄마 아빠 없을 때 형이 아빠인 거야!”
이모부가 처음으로 말을 건네셨다.
“형이 무슨 아빠야? 아빠가 아빠지!”
“이젠 아빠가 갈 때까지 형을 아빠라고 생각해야 되는 거야. 알겠지?”
“알았어. 엄마 아빠 빨리 올 거지?”
“그럼 그럼, 고모 고모부 말씀, 민준이 형아 말 잘 듣고 있으면 엄마 아빠가 금방 데리러 갈 거야.”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고 수속을 마쳤다. 민준이와 형준이를 데리고 갈 대학생 누나를 만나 두 아이를 인계하고 잘 부탁한다는 말과 도착하면 꼭 전화 달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이모는 두 아이들을 안으시면서
“아프거니 힘든 일 있으면 꼭 고모한테 말씀드리고 밥도 잘 먹고, 건강하게 있다가 엄마가 곧 만나러 갈게. 잘 지내야 돼!”
하며 새끼손가락 약속을 거셨다. 아이들 앞에서 자꾸 우시면 아이들이 불안해 할까봐 애써 밝은 표정을 보이셨지만 목소리에 떨림이 가득 했다. 나도 민준이와 인사를 나누며
“잘 지내고 빨리 와. 한국은 내가 잘 지키고 있을게. 이모도. 지금은 네 키가 더 크지만 올 때쯤은 내가 더 클테니 두고 봐!”
하면서 괜한 허풍도 떨었다.
“고마워! 너도 엄마 아빠 여름에 올 때 너도 꼭 같이 와야 돼.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어. 비행기 꼬리라도 잡고 갈게. 걱정 말어. 하하하.”
“엄마 아빠. 빠이빠이!“
이모는 민준이. 형준이를 다시 한 번 안아주고 둘은 누나를 따라 들어갔다. 손을 흔들고 입국장으로 들어가는 두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바라보다가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너무 허전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진짜 떠났다. 낯선 환경에서 지내려면 지금 제일 두려운 사람은 준이인데 내 걱정만 앞섰다는 사실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이모와 이모부를 안심시키고 동생도 챙기는 커다란 가슴을 가진 민준이를 보면서
‘나도 이제 움츠리지 말고 너처럼 당당해질게. 자신감을 갖고 네가 올 때까지 한층 성숙해져 있을게. 민준아, 고마워! 빨리 만나자.’
이모와 이모부는 오는내내 말이 없으셨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계시는 것이 보였다.
5학년이 되고 새 학기가 되어 새로운 학교생활이 시작 되었다. 민준이가 떠난 뒤 허전함은 있었지만 그럭저럭 지낼 만 했다. 워낙 찰떡처럼 붙어 다닌 단짝이라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필요조차 못 느꼈는데 민준이가 없으니 대신 빈자리를 채워주는 친구들이 생겼다. 수완이는 태권도에 같이 다니면서 친해진 친구인데 검은 띠에 성격이 불 같아서 형들도 못 건드려 옆에 있으면 든든했다. 영어학원에서 만난 세희는 예쁘고 똑똑해 지금 한참 세희앓이 중이다. 자꾸만 눈이 가고 세희 덕분에 영어공부에 탄력 받고 있다. 단어도 열심히 외우고 숙제도 잘해서 칭찬을 들었다. 세희 앞에서는 멋지게 잘 보이고 싶다. 축구하면서 친해진 명식이는 말과 행동이 무지 느려 진짜 답답하지만 축구할 때면 날쌘돌이가 된다. 그래서 축구를 같이 하면서 많이 친해졌고 끝나고 나오면 꼭 컵 떡볶이를 함께 사먹는 친구가 됐다.
준이의 빈자리는 크지만 학교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인싸는 계속 인싸 자리에 있게 되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날 때마다 민준이를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 만족했다.
‘보고 싶다. 민준아! 시간아. 빨리 가라.네 덕분에 필리핀도 가보고 영어 연수도 가고 중학생이 되어 멋진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그 때까지 나도 잘 지낼게. 좀 더 강해지고 너처럼 의젓해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