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부모님의 여행

by oj


엄마 아빠가 여름휴가 때 오신다. 8개월만의 상봉이다. 일주일 다녀가시고 지욱이도 같이 와서 한 달 간 지낼 거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잘 참은 보람이 있다. 형준이는 좋아서 나보다 더 신나 기분이 종일 업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슬슬 투정부릴 대상이 필요했는데 구원투수가 오는 셈이다. 투터 선생님이 게임식으로 매일 가르쳐주시는 영어 공부에 조금씩 흥미가 생겨 향상 됐지만 긴 시간 집중하기는 아직 힘들고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든 어린 애였다.


공항으로 부모님을 마중 가던 날, 처음 마닐라에 도착해 고모 집으로 가던 생각이 났다. 낯설고 두려웠던 내가 이렇게 여유 있는 나로 바뀐 걸 보면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상황에 적응하는 동물임이 분명하다. 고모께서

“민준이, 형준이 엄마 아빠 만나면 얼마나 좋으려나. 이번에 사촌도 온다니 민준이는 좋겠다! 형준이도 좋지?”

"당연하죠. 엄마 따라 이젠 집에 갈 거예요."

“아, 저기 나오신다. 내리자”

고모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와 형준이는 총알같이 뛰어가 부모님 품에 벌써 대롱대롱 안겨 있었다.

“우리 아들들 잘 지냈어? 안본 사이에 키가 많이 컸네. 엄마가 무지 보고 싶었는데...”

하며 다시 꽉 안아주셨다. 정말 그리운 품이었다. 필리핀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던 나였는데 심지어 분리불안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 될 정도로 엄마와 떨어지는 걸 불안해했던 나였는데 벌써 8개월을 부모님 없이 지낸 내가 대견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욱이를 보는 순간 더 울컥 했다.

“너 키가 왜 이렇게 컸어? 나보다 크잖아.”

“운동해서 그런가 보네. 넌 얼굴이 왜 이렇게 까매졌어. 완전히 필리핀 현지인 같은데. 하하하.”

“태권도 아직 다니냐? 검은 띠 땄어?”

얘기보따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엄마가 가져오신 선물 보따리를 푸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여름옷에 샌들에 간식에 형준이가 좋아하는 만화책에 스티커에 한보따리였다. 고모, 고모부 선물도 챙기시고 아이들 선물도 잊지 않으셨다. 함께 지내는 아이들을 만났을 때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우리 아이들 잘 챙겨주어서 고마워! 계속 잘 부탁할게.”

“걱정 마세요. 선물 감사합니다.”

하며 형과 누나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짐 초과되지 않았어요? 뭐가 이렇게 많아요?”

엄마 아빠는 고모 고모부와 차를 마시고 과일을 드시면서 못 다한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아빠가 좋아하는 망고 드시니 좋지요? 망고 먹을 때마다 아빠 생각났어요. 망고스틴은 더 맛있어요. 꼭 육쪽마늘처럼 생겼어요. 여긴 진짜 과일 값이 싸서 좋아요.”

“우리 아들 효자네. 아빠 생각 했다니. 엄마 생각도 좀 해주지. 엄마도 망고 좋아하는데.”

질투하시는 엄마가 귀여웠다. 아빠는

“역시 아빠 아들! 망고 실컷 먹고 갈 거니까 걱정 마!”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가족애인지 모른다.

엄마 아빠와 잠을 자면서

“민준아, 형준아, 학교 잘 다니고 있었어? 힘들지 않고? 선생님과 친구들은 어때?”

“친구들이 다 이상해요. 괜히 실실 웃고 내가 무슨 도시락 싸왔는지 매일 신기하게 본다니까요!”

“맞아요! 고모가 김밥을 싸주셨는데 신기하다고 쳐다보고 무슨 맛인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맛보라고 했더니 우르르 달려와서 하나씩 먹는 바람에 그 날 배고팠다니까요.”

형준이도 거들었다.

“친구들도 다 도시락 싸 오니?”

“아니요. 싸오는 애들도 있고 매점에서 사먹는 애들도 많아요. 근데 고봉밥에 계란 프라이 하나랑 케첩만 줘요. 반찬이 없는데도 잘 먹어요. 진짜 이상해요.”

그 동안 지냈던 얘기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형준이는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 이제 같이 가는 거지? 나 갈 거야!”

하면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잔뜩 투정이 섞여있었다. 형들과 누나가 처음에는 제일 어리다고 귀여워해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무덤덤해지고 약간 고집스런 형준이를 자꾸 열외 시키려는 게 보였는데 형준이가 요즘 소외감을 느끼고 있을 때쯤 엄마 아빠를 보니 투정이 절로 나오나 보다.

엄마가 난감한 듯 말하셨다.

“형준아, 영어는 몇 달로 공부를 할 수 없어. 귀도 열리고 입도 열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니까 조금만 더 참고 잘 지내보는 거야. 약속!”

그러자 형준이는

“싫어, 싫어. 나 갈 거야. 나 영어 얼마나 잘 하는데.”

하면서 갑자기 자기가 아는 짧은 문장들을 말하기 시작하지 엄마 아빠가 엄청 오버하듯 폭풍 칭찬을 하셨더니 칭찬을 듣고 난 형준이의 떼쓰기가 조금 잠잠해졌다.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우린 방학이 아니라서 학교에 가야 했지만 고모가 선생님께 부탁해 수업을 빼고 가족 여행을 간다고 했다. 팍상한과 히든밸리 등 필리핀에 오면 제일 많이 가는 여행 코스를 갔다가 한적한 바다 앞 리조트에서 이틀 묵는다고 했다. 지욱이가 제일 기대를 많이 했다. 팍상한은 세계7대 명소와 영화 장소로도 유명한 대표적 관광 명소에 거대 폭포가 멋진 곳이다. 수상 재킷과 헬멧을 착용하고 ‘방카’라는 통나무배를 타고 사공들이 바위 사이사이를 순수 힘으로만 밀고 1시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팍상한 폭포가 나오고 거대한 폭포 속으로 뗏목을 타고 들어갔다 나온다. 거대한 폭포 물 소리만 들어도 무서운데 그속에 들어가면 출렁거리는 파도와 물에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진짜 스릴 만점이었다.

방카를 모는 사공들을 뽑는 시험이 무척 치열하다고 한다. 월급도 세고 나름 자부심도 있어서 경쟁자가 많이 몰려 시험도 까다롭고 인기도 많아서 그런지 사공들이 바위 사이사이를 피해가는 기술이 절묘하다.

겁이 많은 지욱이가 과연 뗏목을 타고 폭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생각보다 무서워하지 않고 계속 환호성을 질러 놀랐다. 안 본 사이에 자신감도 부쩍 늘고 용기도 많이 생긴 것 같고 듬직해졌다.

팍상한은 패키지여행 때 갔던 곳이였지만 히든벨리는 고급 휴양지라서 지난 번 여행 때 상품에서 빠져있어 엄마 아빠가 무지 아쉬워했는데 이번에 가게 되어 좋아하셨다. 히든벨리는 마킬링 산에 위치해 폭포와 지하수가 솟는 온천수로 만들어진 노천 온천으로 아름다운 곳인데 나도 이번에 처음 가보는 곳이라 기대가 컸다. 6개의 풀로 이루어진 숲속 온천 상상만 해도 멋지다. 부모님이 오신 덕분이다. 넓은 숲속에 위치해 멋진 자연 경관을 마주하며 어른들은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우린 수심이 낮은 곳에서 물놀이를 했다. 물이 따뜻해서 놀기에 정말 좋았다. 점심으로 바나나잎에 찐 밥과 고기와 파인애플과 야채 구이로 한상이 차려져 맛있게 먹었다. 연잎밥은 먹어봤지만 바나나잎으로 찐 밥은 처음이었다.

두 장소 모두 예상했던 대로 너무 좋아서 지욱이는 가는 곳마다 환호성과 감탄을 연발했고 부모님은 히든밸리의 삼림욕 온천욕에 아주 만족하셨다.

바닷가에 도착해서는 짐을 풀고 고모부는 저녁으로 먹을 통구이 새끼 돼지 바비큐를 주문하셨다. 레촌(Lechon)이라고 불리는 장작구이 바비큐는 잔치 음식과 마찬가지인 인기 메뉴이다. 속살이 부드럽고 겉은 바삭하고 쫄깃해 맛있어서 여행이나 특별한 날 꼭 먹는 필리핀 대표 음식이다. 모래사장에 10명가량 모인 현지인들도 모닥불을 피워놓고 레촌에 맥주를 마시며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밤이면 불꽃놀이도 빠지지 않는 노는 걸 보면 흥이 많은 민족이다.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고 몸을 흔들면서 얼마나 신나게 노는지 필리핀에서는 흔히 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고모 말에 의하면 필리핀 사람들은 하루씩 힘들게 일해 번 한 달치 월급을 주말에 즐기면서 금방 다 쓴다고 한다.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거나 투자를 하기 보다는 먹고 놀고 신나게 즐기는 일에 더 열중한다. 미래보단 오늘이 즐겁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면 된다고 여기는 필리핀 민족성도 우리와 다른 민족성에 다른 문화이다.

우리 부모님만 해도 아빠 월급중 적금하고 남는 돈으로 알뜰살뜰 쓰시며 목돈을 마련해 하나씩 하나씩 필요한 것을 준비하신다. 자동차도 그렇게 사시고 조금씩 넓혀간 아파트도 그렇고 이모들도 저축을 습관처럼 하신다. 그런데 요즘엔 꼭 그렇지만도 않고 주식 같은 한방을 바라보고 위험한 투자를 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걱정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필리핀 음식 중 레촌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따호(taho)와 감바스(gambas)가 있다. 따호는 한국의 연두부와 비슷한데 사탕수수 즙에 젤리 같은 싸고(sago)를 넣어 간식이나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는 음식이다. 아침마다 동네 여기저기에서 “따호~따호~”를 외치면 아떼가 나가서 사가지고 와서 아침 식사로 먹는데 맛있다. 한국에서 “찹쌀~떡. 찹쌀~떡”하며 파는 것과 비슷하다. 감바스는 작은 새우를 철판에 볶아 먹는 요리로 맛있다. 하지만 싫어하는 음식도 있다. 발룻(balut)이라는 요리와 두리안 과일이다. 발룻은 부화 직전에 삶은 오리 알이다. 14일 된 오리알이 가장 맛있고 영양만점에 좋은 음식이라고 하지만 이미 형체가 어는 정도 보여 먹기에 적응이 안됐다. 처음엔 노른자 부분만 조금 먹기도 했는데 어느 날부터 냄새 때문인지 심하게 체한 뒤로는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린다. 엽기적인 음식 같다. 두리안은 발 꼬랑내가 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 없다. 고모가 맛있다고 몇 번을 먹으라고 설득했지만 지금까지 먹지 못한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지욱이와 형준이와 바다에 가서 실컷 수영을 했다. 그 곳은 바다 한가운데 오두막 형태의 뗏목을 띄우고 그걸 빌리면 반나절을 놀 수 있다. 작은 배를 타고 뗏목에 내려주면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 구경을 하거나 구명조끼를 입고 근처에서 수영을 즐긴다. 어른들은 비치 의자에 누워 선텐을 하고 칵테일과 과일을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엄마는

“이 뗏목 정말 탐나네! 해운대 바다에 갖다 놓으면 관광객이 넘쳐나서 대박 날 걸...”

맞는 말이다. 여행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유명한 관광지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이색 레저를 선보인다면 인기 폭발일 것이다.

지욱이는 하루 사이로 피부가 까맣게 타버렸다. 햇빛이 워낙 강한 낮 시간에는 선크림도 안바르고 피부가 노출 되면 금방 타버려 조심해야 한다. 우린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친해진 친구들 이야기와 나도 알고 있는 세희에게 요즘 관심이 많다고 했다. 세희 덕분에 영어가 늘고 있다니 지욱이한테는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이번 방학 동안 좋은 기회가 될 테니 돌아가서 세희가 먼저 반하게 원어민 샘과 프리토킹 한 번 멋지게 해봐!”

“그럴까?”

하며 개구지게 웃었다. 진짜 좋아하나 보다.

“넌 처음에 못 온다고 하더니 갑자기 바뀐 거야?”

“이모 덕분이지. 이모가 비행기 티켓팅 해주고 한 달 비용도 절반으로 해주라고 고모에게 부탁해서 아빠가 기분 좋게 보내주셨어. 물론 엄마는 불안하다고 안 된다고 끝까지 반대했지...이모 덕을 많이 본다.”

“이모는 먼저 가셔도 나는 한 달 간 있으니까 우리 실컷 놀자! 네 덕에 필리핀도 와 보고 여행도 하고 호강한다. 호강해. 하하하.”

“이모랑은 좀 어때?”

“전보다는 나아졌어. 내가 공부 좀 하는 척을 했더니 아주 조금 달라지시더라. 우리 엄마 단순하잖아.”

“다행이네.”

“필리핀 살기 어때? 제일 힘든 일이 뭐야? 친구는 많이 사귀었고?”

“장단점이 있지만 적응하다 보니 나쁘지는 않아. 친구 사귀는 일이 힘들지. 빨리 한국 가고 싶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한국 가면 우리 이제 중학생 되네.”

“기다릴게. 빨리 와라!”


이틀간의 여행은 꿈같이 지나가고 부모님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지욱이라도 남아있어 허전함이 덜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엄마는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펑펑 우셨다고 했다. 형준이가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엄마 아빠가 다음 날 간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시무룩해져서는 엄마 무릎에 앉아 축 쳐져 있다가 멀미까지 하고 토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프셨나 보다. 일주일 지내고 또 다시 두 분만 가시니 가슴이 미어져 가는 내내 우셨다고 했다. 속상했을 엄마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엄마 아빠가 가시고 나니 까불거리던 형준이도 시무룩해져서 좀 안쓰러워 보여 내가 아끼던 칼과 방패 장난감을 주었다. 그렇게 탐냈을 때도 끝까지 안 줬는데 형준이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어린 애이다.

우리가 학교 가는 동안 지욱이는 1대1로 튜터와 공부를 하고 주말엔 우리가 보낸 여느 시간과 다르지 않게 지내다 보니 한 달도 금방 지나갔다. 지욱이까지 가고 나니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다. 서서히 선생님과 친구들의 말이 조금씩 귀에 들리더니 아기들이 옹알이 하다가 갑자기 말문이 트이는 것처럼 나도 조금씩 말이 트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필리핀에 온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다. 이제 1년만 잘 버티고 졸업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지욱이와 중학생이 되어 학창시절을 보낼 생각을 하니 기분 좋아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두리안과 친해졌다는 거다. 천국의 맛과 지옥의 냄새가 나는 과일이라는 말에 공감을 못했지만 이제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냄새 때문에 역했던 두리안을 고모와 사촌 누나 형들이 무지 맛있게 먹기에 한 번 도전해 보았다. 잘 익은 두리안을 밀폐용기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 하면 냄새가 덜하다고 했는데 진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끝 맛이 고소해 망고와는 다른 색다른 맛이었다. 다른 과일에 비해 열량이 높다는 단점만 빼고 최고의 과일이 되었다. 과일 좋아하는 엄마도 두리안은 못 드시고 갔는데 나중에 꼭 도전해 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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