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부 > 할아버지 일기장
1화. 할아버지 첫 기일
할아버지 첫 기일이 돌아온다. 할머니 집에서 첫 기일 추도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작년에 할아버지께서 3개월 투병하시다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임종실로 옮기셨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가는 차안에서 엄마는 조용히 흐느끼시더니 점점 오열과 통곡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엄마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새해를 이틀 앞둔 때였다.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가 새해를 가벼운 마음으로 맞으라고 서둘러 가셨나 보다고 말씀하셨다. 엄마와 이모들도 그 말에 동의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포근한 날씨가 이어져 어려움 없이 장례를 치르고 선산에 모시고 돌아오면서 할아버지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선산은 숲으로 둘러쌓여 햇빛이 잘 드는 높은 곳에 있었다. 매장을 하셨지만 앞으론 매장이 법으로 금지 되어 합장하시게 될 할머니는 화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딸들이 많으셨던 할아버지는 늘 딸들 덕분에 산다며 좋아하셨지만 막내 삼촌은 유일한 아들이라 그런지 더 많이 의지하셨다. 엄마는 막내 삼촌 덕분에 태어난 인생이라며 농담으로 자주 말씀하셨다. 아들선호사상이 심했던 시대여서 딸들만 내리 넷을 낳으신 할머니는 맘 고생이 심하셨다고 했다. 삼촌을 낳고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고 하셨는데 할아버지께서도 살아생전 그런 삼촌을 많이도 의지하시고 사랑하셨다.
첫 기일인 만큼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들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셨다. 낮부터 전부치는 냄새에 잡채까지 할아버지 생신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할아버지 생신은 최고의 잔칫날이었다. 할아버지는 4남매, 외할머니는 8남매이신데 그 많은 형제들이 모두 모여 시끌벅적한 생신날을 보내곤 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음식을 넉넉히 하신 덕분에 동네 분들을 초대해서 또 한 번 초대상을 차리셨다. 단독 주택에 사시니 가능한 일이었다. 아파트에 살면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데 할머니께서는 단독 주택에서 이웃들과 오랫동안 친분을 나누셔서 이웃사촌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고모부 할아버지 두 분이 돌아가시고 큰할아버지에 이어 우리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네 분 형제들 중 고모 할머니 두 분에 큰 할머니. 우리 할머니만 남으셨다.
삼촌 할아버지 두 분께서 인절미를 한 박스를 가지고 일찌감치 할머니댁으로 오셨다. 할머니 큰 오빠이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남동생인 삼촌 할아버지 두 분이 오셨다. 동생 외삼촌 할아버지께선 월남전에 참전 했다가 유공자가 되신 분이신데 지뢰를 밟고 두 다리를 잃으셔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신다. 할머니께서 사고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동생을 만나러 병원에 갔는데 살아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심하게 다치셔서 결국 감염으로 두 다리를 절단하셔야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절망하셨다고 했다. 가족들이 삼촌 할아버지를 그 때 잃으시는 줄 알고 아찔했다고 할머니께 자주 들었다.
고엽제 피해까지 입으셔서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진통제로 사신다고 했다. 고엽제는 초목을 죽이는 제초제로 미군이 월남전 때 밀림을 없애고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중에서 대량 살포하는 무기로 사용했다. 그래서 작전 중이던 한국군의 피해가 컸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각종 암과 신경마비를 일으킨 참전자들이 많았을 만큼 강한 독성 물질이라는 것도 삼촌 할아버지를 통해 듣게 되었다. 그런 남동생을 할머니는 측은하게 여기시며 끔찍이도 아끼셨고 할아버지께서도 살아 생전에 삼촌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큰 삼촌 할아버지께서도 할머니를 보시곤 얼굴이 많이 상했다며 걱정하셨다. 삼촌 할아버지께선
“누이, 시간 참 빨라요. 벌써 1년이 되었네요. 매형 참 그립네요.”
하셨다.
“그러게 말이다. 할아비가 없으니까 살맛이 안 난다.”
하시며 또 눈물을 훔치셨다. 할머니께서 우시는 날이 많아졌다. 우리도 빈자리가 이렇게 크고 허전한데 할머니는 어떠실까 싶었다. 삼촌 할아버지께선 나를 보시고는
“많이 컸구나. 네가 승윤이지?”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처음에 삼촌 할아버지를 뵈었을 때는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워서 엄마 뒤에 숨었다. 두 다리가 없으신 삼촌 할아버지는 항상 반바지를 입으시고 두 손을 짚고 이동하며 다니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늘 방석을 준비해두셨다. 훨체어에서 손으로 집고 방석으로 내려오시고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생활하시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어보였다. 게다가 브레이크와 액셀을 손으로 작동하시며 운전도 하시고 여기저기 많이 다니신다. 의지가 강하신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국가 유공자라 해도 장애를 입으신 몸으로 살아가기 무척 힘드셨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어서 삼촌 할아버지가 마음 고생하셨을 거란 사실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연금으로 생활하기 전혀 어려움이 없으시고 네 자녀들도 국가 유공자 자녀 혜택으로 대기업에 취직해 모두 잘 풀리셨다고 엄마가 해주신 얘기를 들었다. 국가에 헌신하고 그만한 보상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 할아버지 아시는 분은 안타깝게도 참전 후 귀에 스친 총알로 청력을 잃었는데도 치료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도 못 받고 유공자로 인정 못 받으신 분도 계시다고 한다.
삼촌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모들이 둘러앉아 할아버지를 추억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오남매에 손자가 열둘이니 다복하신 분이셨다. 할머니는 이모들이 아기를 낳을 때마다 산후조리원이 아닌 집에서 산후 조리를 해주시고 일하는 이모들의 아이들까지 돌봐주시면서 모성애와 억척같이 강하신 분이었다. 젊어서는 증조 할아버지 댁에서 농사일에 밭일까지 부지런히 일하시고 어려운 여건에서 오남매를 잘 키우시고 시집장가 보내시고 지금은 우리들까지 돌봐주시면서 강인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오셨다.
그런 할머니께 엄마와 이모는 늘 감사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빈자리는 컸다. 혼자 남으신 할머니도 가끔 먼 산을 바라보시는 것처럼 허전해하시며 표정이 늘 어두웠다. 평소에 잘 웃으시던 할머니였는데 웃음기가 사라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할머니 집에 가면 늘 풍채 좋던 할아버지가 앉으시던 쇼파를 보면 너무 허전했다. 언제든
“승윤이 왔냐?”
하시면서 온화하게 웃으시며 맞아주실 것만 같았다. 이모들이 가까이에 살면서 할머님을 잘 돌봐드려도 외로움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언젠가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장모님. 요즘도 많이 우울해 하셔?”
아빠가 묻자 엄마는
“그러게. 부부애가 애틋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아버지를 못 잊는지 모르겠어. 맨날 우셔. 1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더 마음 써드려. 혼자 계셔서 더 그럴 거야.”
할머니는 교회 다니시고 집안일 하시고 자식들 걱정 외에 크게 관심을 두는 일이 없으셨다. 젊어서는 어린 우리를 봐주시느라고 강하게 버티셨는데 이제 몸도 약해지시고 연세도 많으셔서 의욕을 다 잃으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로는 부쩍 더...저녁이 되자 퇴근한 막내 이모와 막내 삼촌이 오셨다. 기족교인 우리 집안은 저녁을 먹기 전에 다 같이 모여 할아버지 첫 기일 추도 예배를 시작했다. 삼촌의 주도하에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믿음이 제일 좋으신 우리 엄마가 대표로 기도를 드렸다.
예배를 다 마치고 삼촌이 우리들에게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물어보았다.
“승윤이 먼저 얘기해 볼래?”
나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뭐가 있었을까 떠올려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철도 공무원으로 오랫동안 일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을 데리고 가끔씩 기차를 태워주셨다. 엄마가 일하러 가면 하교 후에 나는 할아버지 댁에 있다가 학원에 가곤 했다. 학원이 없는 날에 할아버지께서 바람 쐬러가자며 나와 형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문산역까지 갔다. 임진강을 한 바퀴 돌아보고 저 멀리에 북한이 있다면서 망원경으로 보여주기도 하셨다. 정말 가까이에 있는 북한이 실감이 안 났다. 그리고는 북한과 전쟁 당시 피난 갔던 이야기를 간간히 들려주셨다.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짜장면을 사주셨던 일도 생각나서 그 얘기를 얘기했다.
사촌 누나는 할아버지께 자전거를 배운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가 뒤에서 잡고 있는다고 했는데 손을 놨다며 너무 무서웠다고 말해서 한바탕 웃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참 다정하셨다. 약주를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는 약주를 드시면 우리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면서 나와 형 이름을 크게 부르셨다. 늦은 밤에 집으로 들어가시면서 가까이 사는 우리들에게 과자를 사서 한아름 안겨주고 가시느라고 약주만 드시면 꼭 들리셨다. 그리고 볼을 비비고 가실 때면 까칠한 할아버지 턱수염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던 기억도 난다. 아프실 때 병문안을 간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많이 여위시고 눈만 쾡 하게 변한 모습에 너무 놀라고 마음 아팠다. 하루하루 다르게 변하시는 모습에 병원에 다녀오신 날은 종일 우울해 하셨다. 하루 종일 병실에서 병간하시는 할머니에게 식사를 가져다주시느라고 오후에 출근하시는 엄마와 이모들은 거의 매일 병원으로 갔다. 췌장암으로 수술도 못하시고 3개월 시한부를 선고 받으신 뒤 호스피스 병동에서 투병하시면서 나중에는 진통제로 연명하시다가 임종실에서 돌아가셨다. 장례식 내내 눈 밑이 짓무를 정도로 우시는 엄마를 보며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그 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하긴 엄마가 잠시만 연락 안 돼도 불안한데 부모님이 내 곁을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상상이 안 된다. 추도 예배가 끝나고 낮부터 준비한 맛있는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삼촌 할아버지가 가져오신 인절미는 말랑말랑하니 맛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갈비찜도 정말 맛있었다. 삼촌 할아버지는 주무시고 가신다고 하셨다.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는데 엄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승준아. 승윤아. 할아버지가 일기 쓰신 것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