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 포인트

by oj


나에게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시점이 몇 번 있었다. 어릴 때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초등시절 내내 주목받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다. 예뻐서. 공부 잘 해서. 재능이 많아서. 학교 활동을 활발히 해서. 반장. 부반장을 맡아서 등등 내겐 하나도 해당 되지 않는 사안들로 늘 위축되고 주눅들어 있었다.


이름마저 창피해할 만큼 어릴 땐 자존감이 낮았다. 돌림자인 아침 '조' 자의 내 이름이 너무 싫어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들이나 돌림자를 쓰지. 딸들까지 돌림자로 이름을 지을 게 뭐람!'

학교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것조차 싫어 나를 숨기고 싶었고 내세울 것이 없는 내가 너무 싫었다.


처음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은 5학년 때 선생님이다. 학교 가까이에서 자취를 하고 계셨는데 새학기 교실 환경 미화를 돕고 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주셨다.

선생님 댁에 가봤다는 사실만으로 나의 자존감은 높아졌고 그 뒤로 선생님께 더 인정받고 싶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당시에 전과 하나와 문제집 하나로 수업 시간에 집중하며 공부하다 보니 조금씩 성적이 향상되었고 6학년 졸업 때는 우등상을 받고 메달을 목에 걸고 졸업할 수 있었다.


높아진 내 자존감은 중.고등학교 때 빛을 발했다.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으며 친구도 많아져 주목받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를 좋아해주는 남학생도 있었고 연애 편지도 많이 받고 꿈을 키우던 그 때가 나의 화양연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대학이었다. 경기도 변두리 학교에서 겨우 수도권 대학에 들어간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실감했다.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서울 명문고에 나온 친구들 속에서 내 존재가 미약해 보였다. 압구정. 평창동에 사는 친구부터 아빠가 교수인 친구 등 40명의 학생 중 경기도 변두리 출신은 거의 없었다. 그 중 강원도. 강화도에서 온 몇몇 친구들도 있었지만 다들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난 대학에 들어가서 성적 장학금 한 번 받은 것 외에는 성적도 과활동도 아주 평범했고 의지도 약했다. 친한 친구들과 시험 끝나면 놀러다녔고 과외 알바 겨우 하며 나름 열심히 생활했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욕심도 열정도 없이 원하던 꿈도 이루지 못 하고 졸업했다.


교육학과여서 부전공으로 국어국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논술 강사로 자림매김 하기까지 국문학 부전공이 큰 도움이 되었다. 졸업 전에 회사에 입사하고 준비했던 임용 고사를 봤지만 떨어졌고 2년 사회생활은 결혼과 동시에 퇴사하면서 끝이 났다. 그 시대는 결혼하면 퇴사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적성에도 맞지 않아 전혀 아쉽지 않았다.


세 번째 터닝 포인트는 결혼과 육아였다. 시댁에서의 2년은 인내심과 배려를 배우면서 허니문 베이비로 들어선 첫째를 결혼 1년도 안돼 낳고나니 송두리채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모든 중심이 아이였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에 내 사랑을 다 쏟아부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불편했던 관계도 육아를 도와주시면서 가까워졌고 아이를 쉽게 키워 감사했다. 분가하고 3년만에 다시 시작된 둘째 육아는 처음엔 힘에 부쳤다. 다행히 첫째도 순했는데 더 순한 둘째 덕분에 편하게 육아를 감당하며 터울이 있어 조금씩 수월해졌다.


네 번째 터닝 포인트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때였다. 둘째가 5개월 때 사교육을 줄인다는 목적으로 학교에 방과 후 특기적성 강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면접을 봤다. 남편은 둘째가 5개월인데 무슨 일을 하냐며 반대했지만 다 키워놓고 일하려면 누가 나를 써주냐며 강한 내 의지를 꺾지 못했다.

교육을 받고 학교에 투입 되면서 교재와 모든 자료를 도와주는 회사가 없었다면 막연했을 거다. 그렇게 안착한 회사에서 십여 년 일하고 퇴사해서 혼자 독립해 일을 시작했다. 10년간의 경력과 노하우는 개인 강사로 서기에 충분했고 학교 수업을 하면서 팀 수업을 병행하며 종횡무진 달려왔다.


큰 아들은 가까이 사는 언니가 작은 아들은 친정 엄마가 돌봐주셨고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는 한층 편해졌다.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꿈이 교단에 서는 거였고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도 맞았기 때문이다. 첫 아이 임신해서도 출산 일주일 전까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니 일 욕심도 있어 쉬지 않았다. 오전엔 그룹 상담 봉사까지 하면서 참 열심히 달려온 30.40대 내 인생이었고 젊음이었다.


마지막 터닝 포인트는 암 수술이었다. 종횡무진 달려온 내게 47세에 찾아온 유방암 진단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벌써 9년이 되어가지만 그 당시 나에겐 너무 충격이고 두려움이었다. 첫째는 군복무 중이고 둘째는 고3이어서 아이들에겐 사실도 숨겼다. 다행히 초기에 전이도 안 되고 수술도 잘 되어 수술 후에 두 아들에게 말하자 아들들은 왜 말하지 않았냐면서 안타까워했다. 항암 없이 방사선 21차례를 받고 치료가 끝났을 때 너무 감사하고 안도했다. 그 뒤로도 5년 동안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마음이 불안하며 결과에 늘 숨죽이던 시간은 지금도 여전하다. 암환자들의 피할 수 없는 걱정이자 숙제이며 마음의 짐이다.


암 수술 뒤로 달라졌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고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해 12월 투병하시던 아버지까지 떠나보내면서 마음속에 담겼던 생각과 감정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면서 글로 쏟아냈다. 예전엔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6개월 쉬고 나선 기다려주신 분들만 수업하고 절반으로 줄여 남은 시간은 여행을 다니며 여가를 보냈다. 수영을 배워 꾸준히 운동하고 산책을 즐겼다. 글을 쓰게 된 것도 그 시점이니 지금까지 탄력을 받아 지루할 틈이 없다.


올 봄 작은 아들 결혼에 이어 내년 봄이면 큰 아들까지 결혼하면 또 한 번의 터닝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남아 도는 시간을 더 계획성 있게 보내야 할 것 같다.


몇 번의 터닝 포인트는 완전히 다른 나로 바꾸고 지금의 안정과 여유를 안겨주었다. 예전의 자존감 낮았던 '나' 도 지금의 안정된 '나' 도 미래에 만날 '나' 도 모두 같은 나이다. 심적.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여유가 생겨 하반기 내 인생은 성숙과 완성을 향해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