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석 작가님의 <너의 안부를 묻는 밤> 에 나오는 글이다. 관계에만 있는 줄 알았던 갑과 을이 마음에도 있다니 전혀 생각치 못했다.
연애 시절엔 더 사랑받는 이가 갑이고 상대방이 을일 테고, 결혼해선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이 갑이고 타서 쓰는 사람이 을의 입장일 테고, 자식은 언제나 갑이고 부모는 을의 입장일 것이다.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말이다.
인간관계의 갑과 을도 있다. 한쪽은 상대방의 일상이 궁금하고 더 많이 알아가고 싶은데 한쪽은 무덤덤하며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한다. 처음엔 서운하기도 하고 개의치 않고 먼저 다가서서 관심을 가졌다면 이젠 피로감이 느껴진다.
'굳이 왜, 바라지도 않는 사람에게 내 마음과 시간을 써야 하지?'
하는 마음으로 어느 순간 바뀌었다.
난 사람들을 좋아하고 인간관계에서도 크게 문제가 없는 편이었다. 주변에서도 늘 좋은 사람을 만나 인복도 많다고 자부했다. 일곱 식구에 많은 친인척들 속에서 부비고 자라다 보니 배려나 관대함, 솔선수범 등이 나도 모르게 스며든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서 만나는 지인들이 있다. 남편 친구 아내들이고 남편은 50년지기, 우린 30년지기 친구이다. 결혼하면서 만나게 된 사이라서 나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네 사람이지만 마음이 잘 맞아 부부 모임 외에 따로 모임을 갖고 여행을 다니기도 하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아이들 태어나고 키우고 자라고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의 근황까지 서로 잘 아는 친밀하고 서스름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나이가 제일 어린 J는 내향형에 전형적인 T형이다. 꼼꼼하고 완벽하며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거기다 장녀라서 성숙하고 생각이 깊다. 7년 만에 낳은 딸을 애지중지 키우면서 밖에서 모임을 하다가도 낮잠을 재워야 할 시간엔 어김없이 들어갔다. 여행을 가서도 아이를 재워야 하는 시간이면 방으로 들어간다. 우린 여행 기분을 살려서 수다도 더 떨고 싶고 아이들도 실컷 놀다가 자고 싶을 때 자면 되는데 제 시간에 안 자면 다음 날 짜증 부리고 더 피곤하게 한다며 늘 원칙대로 한다. 지금도 이런저런 습관들이 일관성 있게 지켜지며 변함없다. 서로 다른 것이니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 중 나이는 제일 어린 데도 오히려 언니들이 애교를 부리고 있다. 남들에게 민폐끼치는 것을 싫어하고 계획성 있게 생활하는 칼 같은 성격이다. 가끔은 그런 원칙이 답답하지 않을까 싶다. 그 부분은 나와 맞지 않지만 서서히 J의 성격을 알게 되면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응대하기가 편해졌다.
M인 한 언니도 내향형이지만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펑펑 울고 눈물이 없는 나를 신기하게 여긴다. 난 드라마에서 공감하는 부분도 많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일들이 많으니 지나치게 몰입하지는 않는다.
<미스터 션사인> 같은 드라마나 <암살> <밀정> <사도> 같은 영화처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들은 예외이다. <미스터 션사인> 마지막 장면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세 남자의 모습에 눈물 흘리며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눈물이 없는 나였지만 나이가 드니 감정이 자주 울컥거린다.
한 친구는 나와 동갑으로 우린 궁합이 잘 맞는다. 외향형에 공감을 잘 하고 친구이기도 해서 더 친밀하다. 털털한 성격에 사람들 좋아하고 정이 많다는 것도 비슷하다. 옷을 입는 스타일이나 말투. 행동까지도 말이다. 두 사람이 내향형으로 비슷하고, 친구와 나는 외향형이라 비슷해 네 사람의 조합은 잘 어우러진다.
최근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틈이 생겼다. 주일에 예배 시간도 다르고 서로 맡은 일이 달라 얼굴도 못 보고 온 날이 많다. 그런 날엔 항상 단톡에 왜 안 보였냐며, 일찍 갔다며 꼭 안부를 묻는 나였다. 그럼 한두 명씩 답이 들어오고 서로 한주간 있었던 일을 짧게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묻지 않으면 먼저 톡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친구와는 둘이 통화도 하고 개인 톡도 자주 주고 받는다. 어느 날 내 마음을 말했더니 자기도 똑같이 느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늦둥이 아들이 고3이라서 이번 보홀 여행도 함께 가지 못해 많이 아쉬워 했다. 거기다 집을 짓게 되고 완공하면서 이사 준비까지 겹쳐 온갖 신경들을 다 쓰고 있는데 한번도 J가 묻거나 어떻게 진행 되는지 와 보지도 않았다면서 서운함을 크게 드러냈다.
난 이해하라고 했다. J는 다른 사람이 신경 써주는 것도 별로 원치 않고, 개인적 성향도 강하고,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어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며 대변해주었다.
뒤늦게 일을 시작해 지금 한참 바빠 시간에 쫒기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친구와 내가 마음을 써주는 만큼 관심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젠 애쓰지 않기로 했다.
성격 탓, 상황 탓이라고 이해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지나치게 잘 하려고도 말고 자연스럽게, 마음도 적당히 주기로 했다. 그동안 내 노력이 허사라고 생각하진 않아도 이젠 애쓰며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
나이가 드니 서서히 인간관계도 변하고 마음도 달라진다. 서로 다른 성향을 이해하니 서운할 이유가 없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니 마음 편하다. 마음의 갑과 을에서 벗어나서 마음의 거리두기를 하니 홀가분하고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