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튼튼한 나무가 되기로

첫상담

by 썸머트리

약을 먹을 정도의 우울감과 경계선 성격장애가 있다는 분석결과를 들었다.


당황스러웠다. 약을 먹어야 할 우울감이라니, 예상도,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경계선 성격장애라니.

애써 난 그 정돈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정리가 안되는 비슷한 감정들을 끌어안고 살았던 날들이 너무 길어서 스스로 객관적으로 못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단 왜 이렇게 나왔는지 들어보자’ 하며 눈물 날것 같은 기분을 누르고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상담 이틀전에 집에서 혼자 3가지 검사를 실시했다. TCI, MMPI, 문장완성검사.

선생님은 MMPI 결과를 보여주었다. 해석할 수 없는 삐죽삐죽한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Border line 위로 살짝 솟아 있는 지점을 가르치며, 우울이 높아요. 약을 먹으면 나아질 수 있어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 옆에 있는 다른 삐죽이들을 가르치면서 또 말씀하셨다. 이건 모범생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완벽주의도 있네요.


또한 내성적인 편이며 굉장히 수동적이고, 여성성이 높게 나오는데 남성성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20대 내내 약대를 가기위해 노력하고 결국 합격하여 약대를 다니면서도 항상 이건 내가 원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인정욕구가 너무 높고 사람들의 칭찬으로 먹고사는 사람인지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오랜기간 그런 삶을 살다 졸업하고 30대가 되어 약국 일을 시작했는데, 이 정도로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시선에만 맞추어 살다가 이제는 원하는걸 찾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짙어져 결국 이러한 결과가 나온것 같다.


그리고, SCI 검사. 기질과 성격 모두를 보여주는데, 기질은 자극추구(99%), 안정지향(100%)가 둘 다 극단적으로 높으면서, 사회적 민감도도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성격적으로는 자율성이 제로였다. 충격이긴 했지만 자율성의 경향성은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 검사를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책임을 지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게 보였다. 선생님은 기질과 성격을 종합했을 때 전형적인 경계선 성격장애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셨다.


처음으로 경계선 성격장애를 들은 건 선미라는 연예인이 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영상을 봤을 때다. 불암감과 극심한 감정기복을 특징으로 갖고 있으며 사람에게 집착하고, 사랑을 확인하려 하고, 자해, 가스라이팅까지 하여 피 말리게 하는 장애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난 그렇진 않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아 근데 그러기엔 내가 깊은 관계, 특히 이성관계를 시작하지조차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기질적으로 자극추구, 안전지향이 둘 다 높은 사람은 자극을 느끼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많지만 두려움에 그 자극에 가 닿지 못하는 사람이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부딪히며 내가 원하는게 뭔지 확인할길이 없으니. 나 같은 경우는 특히 이성관계에서, 너무 두려워서 원하지만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경계선 성격장애 특징 중 하나인 흑백논리도, 그 사람을 어서 규정지어야 내가 그 상황을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어서 빨리 결정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마 이게 이성관계에서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경계선 성격장애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불안정한 대인관계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사회적 민감도가 높아 감정 개방성이 낮은 덕분이라고 하셨다. 개방성까지 높았으면 내가 느끼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에 관계가 파탄났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극심한 감정기복으로 폭발적으로 화낸 적이 종종 있긴 하다. 그것이 기질과 성격으로인한 혼란스러움과 두려움 때문인줄은 몰랐다. 특히 가족과 그런 트러블이 잦았다. 20대때 관심을 갖고 다가온 남자에게도 그랬다. 그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그땐 이성이 마비가 되었다. 그냥 화가 흘러나왔다.


자율성은 너무 낮다면서 이걸 키워야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게 뭔가 생각하다가, ‘제가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락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여쭤봤더니. 둘 다 불안이 높고 특히나 상대방이 회피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 관계가 힘들 수도 있다고 하셨다. 아.. 예상은 했지만 또 확인사살.


제가 DTS에 가는 건요? 했더니 종교적인 것도 좋지만, 우선 심리상담을 5회라도, 아니 최대한 길게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심각하다고 하시니 나도 덩달아 심각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깊게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보기엔 멀쩡하지만 스스로가 너무 힘들지 않냐고 했다. 맞다. 너무 힘들다. 내가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유치원때부터 지속이 되었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 모습을 숨기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다.


거진 2시간이 지났을까. 상담소가 문을 닫아야하는 시간에서 16분이 지나있었다. 직원분이 퇴근해야한다면서 부랴부랴 가방을 싸며 상담쌤이 말씀하셨다. ‘썸머씨, 누군가 기댈 수 있는 크고 튼튼한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기회가 온 거라,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온거라고 생각해봐요. ‘ ‘그리고, 여기 아니어도 좋으니까 꼭 상담받아요. 썸머씨. 보통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요.’


가슴과 목구멍이 답답했다. 왜 나는 30대 초반인 지금 안거지. 왜 스스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지. 아니, 노력은 했지만 왜 종교에만 의지했지. 라는 억울한 물음표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집에 가면서 경계선 성격장애에 대해 계속 찾았다. 관계를 파괴하기에 피해야 하는 사람, 정신 질병 중 우울증, 불안장애와 같은 신경증과 조현병, 망상장애와 같은 정신증의 경계에 위치해서 더욱 치료하기 어렵다는 말. 기질적이고 성격적인 부분이 커서 약물로 빨리 호전되기 어렵다는 등. 어렵고 힘들다는 말만 보였다.


지금까지는 이 불안함을 내비치지 않으려 발버둥쳤는데 이젠 고치기 위해 발버둥쳐야하나. 또 애써야하나.

내가 나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길게 살아가야 하니까, 또 애써보기로 마음을 먹으며 집에 도착했다.


좋아하는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그 장애가 언니를 규정짓는다고 생각하지마. 그리고 자율성이 문제라고 했으니 그냥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


가장 친한 약대 동기인 그녀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참다참다 참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짜증내면(감정개방성을 높이면) 그런 솔직한 모습이 좋다고 해준 아주 유일한 사람이다.


대신 나도 상대방의 그런 모습을 받아줘야했기에 그 관계를 유지하기 괴로웠지만 이제는 서로에게 안전기지가 되어 감정을 내비친다.


나의 두려움을 완벽히 넘어설 수 있었던 관계이다.


내 모든 단점에도, 이런 관계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게 너무 감사한 밤이었다. 여전히 눈물은 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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