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상담-1
‘선생님, 저 또 일냈어요.
…결국 다시 연락했어요. 근데 칼답이 왔어요. 여자친구가 생겼대요. 말투도 존댓말로 바뀌고요. 너무 놀랐어요.’
‘너무 놀라서 뭐라 답장해야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다음날로 넘기고… 밤에 정신차리고 답장을 했지요. 하고 싶었던 말은 해야하니까요. 친구라도 되고 싶었다고, 상담을 받다보니 나도 그다지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그래서 만나서 다시 얘기해보고 싶었다고..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축하하고 잘 지내라고.. 답장했어요.’
‘그리고 답장이 없더라고요. 답장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해요. 아마 현 여자친구에 대한 예의였겠지요.’
‘잘했어요. 썸머씨. 잘했어요.
이번주에 어떻게 지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일에 더 집중이 안되고…, 괴로웠어요.’
실장님은 종종 지식적인 질문을 한다. 그날은 답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몇 초 만에 찾을 수 있는 것을 못 찾아내네요?' 라고 했다. 워낙에 비난조로 말하는 사람이라 입사초반에는 그런 사람이라 치부하고 무시하려 했지만, 그날따라 자기 비난으로 돌아왔다. 호르몬으로 인해 이걸 튕겨낼 힘이 없었고, 그냥 내가 모자른가보다. 로 마무리되었다.
‘썸머씨, 지난번의 썸머씨의 스키마가 ‘자책’이라고 했죠. 상대방이 비난조로 말하면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어요. 그렇지만 두번째 화살을 자기에게 돌리진 않을 수 있어요.’
‘그게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 음… 제가 자꾸 그 애 얘기를 해서 죄송한데요,’
‘오, 썸머씨, 죄송해하지마요. 여기는 썸머씨 얘기를 하는 곳이에요. 그 친구 얘기를 해도되고 어떤 얘기를 해도 되는 공간이에요.’
문득 어제 오랜만에 시작한 운동에서, 선생님께서 그런 자세로 하면 안된다는 말에, '죄송합니다.'라고 답하던 내가 생각났다. 선생님과 나는 둘다 웃으며, 사회생활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는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썸머씨 그냥 1년동안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제가 정말 잘못한 거면요?’
‘썸머씨는 그렇게까지 큰 잘못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그럼 '죄송합니다'를 다른 말로 바꿔봅시다.’
‘시정하겠습니다?'
‘그것도 좀 강한 것 같아요.’
‘그럼 알겠습니다..?’
‘그게 좀 더 낫지 않겠어요? 썸머씨, 그 자책이란 스키마는 콘크리트 같은 거에요. 30년을 그렇게 살았는 걸요. 그래서 습관적으로 또 스스로를 비난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처음부터 고쳐지지 않는다고 해서 상심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나는 [죄송합니다] 금지령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오전, 어김없이 상담날 했던 실수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시간이 있었다. 습관적인 ‘죄송합니다.’를 삼키고,’네, 알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날 오후에는 약국용 처방전을 환자가 들고가 처방전이 분실되는 실수를 했다. 씨씨티비를 보니 나는 멍 때리고 있고, 환자는 자연스레 들고 가고 있었다. 몇 명에게 실수에 대한 피드백을 또 받았다. 나는 또 '죄송합니다'를 삼키고 ‘네, 다음부터 안그러겠습니다.’라고 했다. 사실 몇주 전부터 기력과 집중력이 돌아오지 않아 다음부터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이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숨이 콱 막히는 그 공간에서 이 정도 미션을 해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1년 금지령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