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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월 Jun 05. 2023

삶을 살아가는 세 방식

당신은 왜 사는가?

 삶을 살다 보면 종종 드는 생각. 아무리 찬양론자들이 세상 속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의 위대함, 그리고 사람 간의 깊은 연대와 사랑을 찬양하더라도 실제로 살아가는 우리는 늘 좌절과 우울, 공허함, 무료함에 잠겨 행복보다 고통이 훨씬 만연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물론 부유한 가정이나 자연재해, 전쟁, 기근과 관련이 없는 환경, 혹은 단순히 세상을 너무나 긍정적이고 밝게 바라보는 소수 사람만의 특성 덕분에 삶에서 느끼는 고통보다 하루하루 얻어가는 쾌감과 행복이 압도적으로 높은 돌연변이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또한 그런 밝은 삶에서 얻는 기쁨도 점차 적응되어 '행복하다'라고 느낄 수 있는 역치가 높아진다. 이는 같은 행위에도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 점차 낮아져 이전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은 여전하지만 그것은 곧 당연함과 익숙함이 되어 다시 공허함, 무료함에 잠겨버린다. 다시 역치를 넘길 정도의 격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곰팡이처럼 마음을 잠식시키며 덩치를 키운 공허함과 무료함이 깊은 우울로 이어진다. 이를 피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역치가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을 정도의 행복을 일정한 주기를 두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혹은, 능력이 된다면 역치를 넘는 느끼는 행복을 쟁취하고 나서도 그보다도 더 높은 행복을 또다시 쟁취하는 투쟁의 삶을 살아가던가.


 현대 문명의 발전과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해 주는 다양한 사회 법규 덕분에 행복에 의지하여 이어지는 삶들이 흔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렇지 못한 삶들도 많다. 아니, 이런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위해 사는 삶 보다 그렇지 않은 삶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행복을 위해 살지 않는, 살 수 없는 이들의 삶엔 행복이라는 감정이 부재하다시피 하기에 그 빈자리는 이전에 서술된 좌절, 우울, 공허함과 분노, 무력함 등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채워 넣는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 자체를 크고 작은 고통이 이어지는 고통으로 보기에 삶이 이어지지 않고 극단적으로는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더욱 취약한 환경이지만 이들에게도 살아가려는 이유 또한 확실히 존재한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 살아가거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보다도 어두운 삶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알고 있기에 현재의 상태를 지키기 위해 사는 등의 이유다. 어떻게 본다면 단순히 '행복'이라는 감정에만 매료되어 살아가는 이들보다 보다 복합적이고 고차원적인 이유로 살아가는 것처럼 볼 수 있지만, 사는 이유 따위야 고차원적이던 단순하던 그 삶의 평균치가 행복과 불행 중 어디에 더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판별되고, 결론적으로 수많은 철학자들과 창작물들이 이야기하듯 인간에겐 오직 행복할 의무만이 존재하기에 행복이 부재한 채 이유만 남아있는 삶은 슬프게도 이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 보단 목적만을 갈망하는 짐승으로써의 삶에 가깝다.

사람들에겐 정말 제각기의 거창한 삶의 이유들이 있고, 셀 수 없이 많은 살아가는 이유들이 있지만 이들을 모두 모아 정리하면 단순하게 정리된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 - ),

지금의 것을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며 ( 0 ),

자신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 + ).

 혹은 특별한 삶의 이유가 없음에도 그저 살아있기에 삶을 이어갈 뿐인 삶도 있다( i ).


 입발린 소리로 그 어떤 이의 삶도 가볍지 않고, 모든 이들의 삶이 특별하다는 입발린 소리들을 자주 들으나 내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미디어에서 비추는 것처럼 타인들에 비해 더 빠르고, 더 높은 것을 달성한 이들의 삶이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것 또한 틀려먹은 소리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은 그것이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삶이던, 빼앗기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되찾기 위한 삶이던,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한 삶이던 상관없다. 그것을 위해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걸고 필사적이고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 그리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동안 달려온 자신을 고생했다며 인정하고 쓰다듬을 수 있는 삶을 살았는가로 판별될 뿐이다. '타인'은 결코 한 두 편의 글로, 수백 권의 책으로, 그 사람이 삶에서 이뤄낸 결과로, 포장되고 왜곡되어 퍼지는 말 따위로 사람의 삶이 가치 있었는지 판단할 수 없다. 삶을 살아가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자신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감히 타인의 잣대 따위를 내 삶에 들이대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 그것이 어떤 형태의, 어떤 도착지를 향하는 삶이던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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