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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월 Jun 17. 2023

역린 逆鱗

치명적인 성장기폭제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인 현 인류는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조차 죽음이라는 위험 앞에 내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은 각종 스포츠와 오토바이 따위의 취미생활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모든 동물의 가장 강력한 본능인데, 그것조차 이기는 것이 '즐거움'이 주는 유혹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숨조차 즐거움을 희생할 수 있는 인간에게 타인의 목숨은 얼마나 가벼울까. 짓밟고, 괴롭혀서 보여주는 꿈틀거림과 발악은 인간의 추한 면을 극한으로 보여주고 생존을 위한 집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정신적이 되었건, 육체적이건 말이다. 인간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게 어떤 식으로든 저마다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 분명했기에 종교로, 도덕으로, 법률로 동족을 괴롭히고 살생하는 것을 금기하기까지 했었다. 수만 년에 걸쳐서. 그러나 현대에서는 종교는 허례허식이 되어가고 도덕은 가식으로 변질되었으며 법률은 가진 자들의 검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같은 종의 공격성을, 잔인함을 경계해야만 하는 때인 것이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부숴버리면 그동안 만끽했던 즐거움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다는 슬픔이 남는다. 딱 거기까지다. 장난감에 깊이 연민하지는 않는다. 금세 다른 장난감이 생기면 이전 장난감에 대해서는 잊고 새로운 즐거움을 향해 쫓아간다. 그런 와중에도 인간은 가족을, 집단을,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감정을 배웠고 그 속에서 양심과 도덕을 깨우쳤다. 그런데 인간은 여기서 역설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며 일어나는 희생들을 정당화할 장막을 만들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여러 시스템은 착취가 보이는 잔혹함을 가려 쟁취에서 오는 성취감을 극대화시켰고, 조롱에서 오는 죄책감을 분산시켜 책임 없는 쾌락만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 낸 안전한 틀 안에서도 만족할 정도로 즐기지 못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슬그머니 사회적으로 합의된 틀 밖으로 나가 더욱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쾌락을 탐한다. 울타리 밖에 나온 이상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공감과 죄책감이 적용되는 '타인'이 아니라 장난감에 불과한 무언가일 뿐이다. 그들은 장난감이 신경으로 느낄 고통과 정신적으로 부담할 스트레스는 행위를 멈추기 위한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통과 스트레스가 고려대상이 되는 경우라면 쌓일수록 훨씬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원초적이고 격한 반응'을 보일 것이니 행위를 더 격하게 끌어올려 볼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들이 어느 계기를 통해 스스로가 하고 있는 행위의 잘못됨을 느끼고, 여태 장난감으로 대하던 대상에 대해 감정과 도덕을 대입하길 바란다면 이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제야 이를 느끼고 잘못을 뉘우치기엔 여태까지 자신이 한 행위에는 너무도 큰 속도가 붙어있었고, 그 속도와 행위의 무게가 주는 관성은 함부로 멈추려고 막아섰다간 제 스스로가 처참히 망가져버릴 것을 스스로도 알기에 그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려 한다 하더라도 저지른 행위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왔는지 정말 알겠다면,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서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받았을 고통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면 내 앞에 설 생각은 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 고통을 제 것 마냥 공감할 수 있다면 목숨이 붙어있지도 못할 텐데.


 인간의 이런 면은 일부 돌연변이들만 갖고 있는 특성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으며, 단지 '장난감'으로 여길 수 있는 대상이 '어디까지냐'와 '무엇까지 즐길 수 있냐'만이 다를 뿐이다. 모든 인간에겐 저마다의 장난감이 있거나 있었을 것이며, 이에 대한 기억을 무의식으로 넘겨놓고 있을 것이다. 다들 '가해자는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나도 인간인 이상 이 범주 안에 반드시 들어간다.



 나도 누군가에겐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씨발놈이었을 것이고, 지금도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뒤져버렸으면 좋을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내게 고통을 주는, 주었던, 줄 인간을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염치도, 명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대신 스스로를 탓할 뿐이다. 저런 새끼들한테 괴롭힌 당하는 내가 약한 탓이다. 저런 놈한테 얕보이는 내가 우스운 탓이다. 고작 저런 거에 고통을 받는 내가 나약한 탓이다.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안다면 꽤 마음 아플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딱히 부정할 틈 없는 논리이고 향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동기부여로써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야기다. 이 생각이 내게 완전히 자리 잡아준 덕분에 더 이상 나는 흉터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힘든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드러내고 이를 통해 당시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금 당장도 겪고 있는 것처럼 가능한 한 생생하게, 혹은 당시에 느꼈던 것 이상으로 격렬하게 느끼려 한다. 그때의 처참한 오감과 제어가 풀려버린 듯 뛰던 심장박동, 산소를 흡수하지 못하는 듯한 비정상적인 호흡과 머리에 혈류가 몰려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되고 본능만 남던 그 순간을 계속 떠올린다. 이를 떠올릴수록 당장에 범람하던 생산성 떨어지고 쓰잘데기없는 잡생각들은 가라앉고 생각은 명확해졌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다시 뚜렷이 보인다.



 다시는 나약하고 한심했던 그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더 강하고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나 함부로 거들떠보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그것들을 찾아내 내가 받았던 그 특별한 경험들을 고스란히 돌려줄 것이다.


 세상과 인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냉소적으로 보는 것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런데 타인이 보면 오죽할까. 근데 나는 이 생각을 고칠 생각이 없다. 고칠 방법이 없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조롱하고, 착취하고, 배신하며, 너무도 쉽게 등 돌리는 것이 엔트로피에 대한 열역학 법칙과 함께 내가 이 세상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리다. 인간의 이 역겨운 모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성장하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던 인간조차 소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가 눈앞에 넘어간다면 그 악마의 유혹에 반드시 넘어가고 말 것이다.


 그 영원할 순수악의 유혹에 비하면 긍정적인 가치인 변치 않을 사랑과 우정, 헌신, 연민은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 앞에선 유한하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드는 감정일 뿐, 어떤 상황이 펼쳐지느냐에 따라 손바닥 뒤집 듯 바뀔 수 있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추한 인간이라면, 무능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면, '필요 없는 사람'이 된다면 나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건 얼마나 사랑하건 관계없이 내게서 등 돌리고 떠나갈 것이 분명하다.


 악의로 점철된 비수만큼이나 뿌리던 사랑을 거둬가는 순간의 싸늘함도 치명적으로 고통스럽다.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던 사람이 등 돌리고 떠나가는 일 또한 내가 나약하고 한심한 모습이 될 때 일어난다. 엿같은 일은 매번 한 번에 온다고 하지 않던가. 하이에나 같은 역겨운 것들이 나를 물어뜯는 일이건 내 곁의 사람들이 나를 떠나가는 일이건 모두 내가 나약해지면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 빈틈을 메꾸고 동물적으로,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강한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멈출 수 없다. 그 과정이 너무도 버겁고 고통스러워 짓눌려 압사해 버릴 것만 같은 순간이 이어져도 나는 이에 대해 설움을 토로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한심해지지 않기 위해 해온 노력을 스스로 걷어차버리는 웃긴 상황이 되어버리니까.


 그런 건 내 속에 혼자 담아놓고, 그저 더 강하고 굳센 모습만 보여주면 충분하다. 감히 우습게 보고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도록. 언제까지고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어떤 용도로든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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