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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월 Aug 12. 2023

새벽 편지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된다.

 네게 이런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 매일같이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런 속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 물론 만나서도 할 수 있겠지. 근데 내가 겉으론 활기차고 유쾌해 보이는 모습을 연기하지만 실제론 말수도 적고 과묵한 편이라 만나서는 그런 게 어렵더라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면서 네가 날 더 의지하고, 너를 웃게만 만들어주고 싶었어.

분명 그랬는데, 함께하는 일상이 쌓여가면서, 마음이 깊어지면서 괜스레 죄책감이 들어. 나는 네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닌데 너무 좋아해 주고 믿어주는 것 같아서. 내가 바랬던 것이지만 네게서 받는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는 죄책감이 되어 날 짓눌러. 사기꾼이 된 느낌이야. 항상 모순적인 사람들을 경멸해 왔는데, 다가와주었으면 했으면서 정작 다가오니까 이렇게 밀어내려는 걸 보면 나도 경멸하던 사람들이랑 똑같은 것 같아.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환심을 얻는 걸 원했었는데도. 실제로 얻으니까 필요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게 참 우스워. 어쩌면 너나 다른 사람들이 주는 신뢰가, 믿음이, 호감이, 따스함이 내겐 감당할 수 없는 것이란 걸, 내가 소화해 낼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건가 싶기도 하고.


 진짜 자유로움은 솔직해져야만 얻을 수 있다던데 그걸 지금 느끼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네. 그래도 술을 마시면 도리니 타당성이니 하는 것들을 잊고 다시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으니까 좀 편해져. 내가 한 행동이 찝찝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술의 탓으로 넘기거나 기억 안 나는 척도 할 수 있잖아? 이것도 주정뱅이들 보면서 진짜 싫어하던 건데. 거짓말에 모순적인 것들은 역겨워서 꼴도 보기 싫었는데.


 술 좀 마시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 뒤탈 없는 방법이 떠올랐어. 내가 연기하던 모습이 진짜 내가 되어버리면 되는 거야. 항상 밝고,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열정은 넘치고 프라이드는 높으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넘치는 그런 사람.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래도 하고 싶은 것들 참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되지 않을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잖아. 그게 너도 상처받지 않고, 나도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선택지야.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이 외엔 더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네.


 이 편지는 버리는 게 좋겠다. 쓰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도 정리가 된 것 같고, 이 편지를 보내봐야 너는 괜한 걱정거리만 늘어날 테니 말이야.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넌 절대 안 듣잖아? 넌 걱정 같은 거 하지 말고 여태 그랬던 것처럼 밝게 웃고, 힘들 땐 내게 기대고, 사랑스러운 모습만 계속 보여줘. 나도 속으론 노력 꽤나 해야겠지만 여태 보여주던 모습 그대로, 똑같이, 쭉 보여줄 테니까. 지금은 망가진 것도 많고 모자란 것들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지만. 꼭 포장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아니라 겉과 속이 똑같은, 더 좋은 사람이 될게. 네 힘든 일들도 해결해 줄 수 있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 안겨줄 수 있는.


 그러니까. 지금은, 아직은 이렇게 모순적인 나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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