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선 삶을 꿰뚫는 가치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고, 자기 계발서들을 읽으면 어떻게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와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바라는 모습이 어떤 것들인지 알 수 있다. 소설을 통해서 글을 쓴 저자의 정신세계 편린을 엿볼 수 있고, 에세이에선 어느 인간의 삶과 생각을 더욱 직접적으로 볼 수 있다. 경제 분야 도서를 통해 세상이 맥박 치며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는 피와 같은 존재인 돈이 어디서 만들어져서, 어떤 방식으로 흐르는지를 알 수 있고 역사를 통해선 경제를 포함해 개인을 초월한 인류라는 집단이 때론 발전하고, 때론 쇠퇴하며 어떤 방향성을 띄고 변화해 왔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책은 세상에 대해 알 수 있는 통로이며, 인간이 사용하는 문자를 매개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사람에 대해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종종 '왜 이런 걸 정규 교육에서는 알려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당연하다시피 드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처음엔 경제 서적들이었으며, 이후에는 자기 계발서들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고, 최근에는 인문학과 철학에서 강하게 받고 있다. 의문이 생겨난다. 지금의 교육 체계를 만든 이들은 이제야 300권을 조금 넘어가는 책을 읽은 만 22세의 나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느끼고, 더욱 많은 지식을 갖췄으며, 몇 배의 시간을 살면서 얻어낸 지혜들이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것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정규 교육으로써 가르치지 않고, 수학자나 연구원이 되지 않는 이상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미적분이나 벡터에 골머리를 싸매고, 열린 사고를 만들고 풍부한 감성을 지니게 했어야 할 문학을 한 가지의 지극히 좁은 해석에 얽매이게 하는 국어 등을 이해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오직 시험을 치고 난 뒤엔 잊어버릴 암기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은 것일까? 뭐, 답은 간단하다. 그 과정이,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배는 개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자유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될 때 완성된다. 지금의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교육과정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으며,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도 다수 존재하지만, 전체 사람들의 수에 비교하면 하찮을 정도의 가능성이 되어버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생활비를 벌 수 있으니 충분히 가치 있다고 합리화하고, 자신보다 각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며 이 정도면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것이라 합리화하며 행복해한다. 어쨌든, 표면적인 행복일지라도 행복할 수만 있다면 이런 삶도 나쁘지야 않겠다만 인터넷이 발달되며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 또한 천지에 널려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면서 이 합리화조차 불안해지고, 깨어진다. 이렇게 합리화하며 명령받은 일을 곧이곧대로, 의심 없이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이득을 볼 수 있고, 훨씬 풍족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에겐 어찌 보면 인터넷의 발달은 언짢은 일이다. 12년에 걸친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친 인력이, 간신히 '스펙'으로 불리는 능력을 만든 인재들이 자신들의 밑에서 노를 젓고 있어야 소수의 사람들은 편안히 누워서도 나아갈 수 있는데 그런 시스템이 통째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 설명에도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금세 알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교육과정은 성실하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종적이면서도 쓸모 있는 인력을 양산해 내기 위한 공장 시스템 같은 것이다. 당연히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알아야 할 언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 법, 사칙연산, 자연의 원리도 있겠지만 그걸 넘어서서 필요 이상으로 까다로워지는 교육은 얼마나 조건에 잘 들어맞는지, 성실성과 순종성 등에서 품질이 높은 노동력인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높은 품질을 인정받은 노동력은 그에 맞는 전문 능력을 다시 한번 교육받아 품질이 좋은 노동력부터 힘이 강한(현재에는 재력이 강한) 사람의 밑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의 큰 규모로, 그리고 치밀하게 계획된 집단 세뇌와 다름없다. 그러면 세뇌된 노예로서의 행복 따위보다 훨씬 농도 짙은 진짜 자신의 행복을 알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타인이 알려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현상을 연구하는 데에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경험에서, 또 어떤 이들은 현재를 지키는 데에서, 심지어 자신이 얻는 게 없더라도 타인을 돕는 데에서 행복을 얻는 이들까지도 있는데 어떻게 그런 걸 하나하나 알려줄 수 있는가? 여담으로 나는 봉사를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조언은 그 누구에게도 해줄 수 없다. 당장 내가 그런 일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진심으로 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하지조차 못하는 말인데 그런 한없이 가벼운 말로 타인을 설득시키고, 그의 삶에 녹아들게 하는 것은 사기꾼의 재능을 타고났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대한 다양한 곳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많은 길이 있으며 그 길에 따라 또다시 얼마나 많은 행복들이 존재하는지 우선 알아야 한다. 책은 이런 다양한 행복들을 깨닫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