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미래
현재는 과거의 미래입니다. 과거 역시 그 이전의 미래이죠. 인간은 미래를 궁금해하고 예측하고자 합니다.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미래를 정확히 내다볼 수 있을까요?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입니다. 창조주라는 주어와 내다본다는 술어는 호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은 짜증을 낸다.”와 같이 호응이 안되는 주술관계라는 것이죠. 사물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 사물의 처분이나 향방이 전적으로 창조주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침실의 침대의 24시간 후의 위치를 아느냐고 질문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침대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는 것이라면 그가 이동시키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고 그가 옮기면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창조된 지 약 1,600년 후의 미래는 8명을 제외한 전 인류가 대홍수에 익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죠. 이는 창조주가 미리 내다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죠. 그때 창조주가 그렇게 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성서에는 예정이라는 개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것은 무생물적인 것에 한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도 24시간 후의 태양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또한 어떤 면에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때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인간들처럼 이미 알고 있는 얼마의 단서로 추정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인간 사회나 인간 개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은 100년 전에는 100년 후의 미래이고 6,000년 전에는 6,000년 후의 미래이죠. 의식을 가진 존재들에 대해서는 결코 그때 예정된 대로 실행된 것이 아닙니다. 예정된 것이라면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이라고 해야겠죠.
만물의 창조는 인간 중심으로 되어 있고 창조주에 의해 심히 좋았다고 선언될 정도로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래인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 창조가 처참한 실패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대홍수 전에도 인간을 만든 것을 한탄한다는 창조주의 표현도 있죠. 과거의 미래인 현재의 참담한 모습은 창조의 실패를 의미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것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고 또한 예정되어 있지 않죠. 그런 면에서 인간은 형언할 수 없이 존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죠.
“미래의 진실은 없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전적으로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죠. 인과법칙에 의해 지금 심는 것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나 무생물적인 것은 결정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1,500년 후의 지구의 자연 상태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죠.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없는 안정된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은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때 자신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죠. 물론 대다수는 그때 자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확신은 무지에 기인한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나 베드로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에 대해서도 그러하죠. 그것은 창조에 대해서 무지한 인간의 시각일 뿐입니다. 창조주가 이점을 인간들이 알게 하기위해서 인간들에게 전달한 메시지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지금 자신의 선택에 따라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마음을 열고 유일하게 영적인 문제에 대한 진리가 될 확률이 있는 창조주의 메시지로 간주되는 성서에 대해 살펴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