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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Apr 28. 2024

자가당착적인 재정의

자가당착적인 재정의 


창의성은 민감성, 유창성, 유연성, 융통성, 독창성, 재정의 등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민감성은 개선이나 대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감각을 의미하는 데 하나의 언어로 통일될 필요를 느껴 유럽에서는 에스페란토어가 만들어졌고 나름의 문자의 필요성을 민감하게 느낀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것이겠죠. 위에 열거된 다른 특성들도 유익한 창작, 개발에 필요한 것이죠. 에스페란토어는 사용이 안되지만 한글은 엄청 유익하게 사용되죠. 


유창성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정도를 의미하죠. 요즘은 어렸을 때부터 사고력 개발 훈련을 받는 경우가 많아 아이디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의, 창조, 창작, 개발은 물론 유익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해로운 것들도 많이 만들어 냅니다. 만든 것이 부작용이 있는 경우도 많죠. 물품들도 그러하지만 제도나 정책 같은 무형의 것들도 그러하죠. 무슨 발상이나 이론 같은 것들도 해로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발해 보이지만 기만적이거나 허탈한 것들도 있죠. 


기존의 개념을 그릇된 통념이라고 하면서 재정의를 시도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나 공간을 비롯하여 많은 기존 개념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려는 경우들이 있죠. 선과 악, 신에 대해서도 그러하고요. 


그렇게 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해로운 것들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조건에 해당되는 것마저 분별력 없이 그런 시도를 하기 때문이죠. 


그런 것은 입증되고 확립되어 있는 것이고 심지어 증명되는 성질의 것이 아닌 초월적인 것인데 반역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그것이 속박이고 그 틀에서 이탈하여 재정의하는 것을 오히려 자유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것은 반드시 해로운 결과를 산출하고 인류는 그런 것들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범주나 사유의 법칙 같은 것은 재정의 될 성격이 아닌 것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언어를 부인하려 하는 자가당착을 범하는 것이죠. 진리는 영원불편이고 절대적이고 일방적이어서 조금도 가변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재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는 아름다운 것이어서 도무지 재정의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영원히 그것의 지배를 받기를 원해야 하는 것이죠. 


물론 현재 이 비정상적인 세상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조건들은 완전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죠. 그러나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들은 완전하지 않은 것일 수 있죠. 그러나 인간이 임의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신체조건도 결국은 기능이 쇠퇴해지다가 결국 정지하지만 인간이 손써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불로장생을 위한 아이디어는 모두 실패하였죠. 연금술 아이디어 같은 것도 그러하고요. 인간이 물질의 기본성질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이 원래 할 수 없는 것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모든 시도는 좌절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인간이 정책이나 제도 혹은 통치이념 같은 것을 바꾸어서 세상을 얼마나 살기 좋은 것이 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것은 처참한 실패였을 뿐입니다. 지구를 수십 번 파멸시킬 수 있는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한 상황이죠. 끔찍한 정도의 분열과 대립양상을 보이는 것이죠. 게임을 만들어 내도 하필이면 파괴적인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범죄가 가득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고요. 제각기 자가당착적인 재정의를 한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재정의는 올바르게, 그것을 해야 할 그런 성격의 것에 대해, 그런 부면인 것에 대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재정의 뿐 아니라 융통성이나 유연성, 독창성을 발휘하는 것도 법칙을 거슬러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 해롭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그 누구도 이 재정의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이 없습니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죠. 그런 상태였더라도 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올바른 재정의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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