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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Feb 12. 2022

이해란?

이해란?  

   

오성(悟性 understanding, Verstand)이란 생소한 단어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Verstand가 영어로 understanding에 해당하여 동양학자들이 그렇게 번역한 것일 것입니다. 지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그 본질적 의미의 뉘앙스를 적절하게 전달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 본질적 의미는 학문하는데 필요한 사고능력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학문할 수 있는 인간의 지적 혹은 정신적 기능이 오성인 것이죠. 그런데 이 understanding은 보통 이해로 번역됩니다. 이해력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보는 혹은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본다는 면에서 통찰력, 분별력, 지각력과도 밀접히 관계됩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는 직각 삼각형에서 작은 두 변의 길이과 빗변의 길이 사이의 수리적 관계를 파악했습니다. 수학적 통찰력이 작동한 것이죠. 그에 의해 그 설명을 전달받은 사람들도 그것을 알게 되는데 이 경우는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그 설명을 깨달은 것을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통찰력은 발견한 것이지만 그 발견자가 밝혀 줌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것을 보게 되죠. 즉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와 통찰의 개념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의 영역 즉 오성의 영역에서 개발이나 탐사를 하려면 통찰력과 이해력이 필수이죠. 새로운 발견을 하는 데는 통찰력이 필요하고 그에 의해 체계화하고 집대성된 학문을 공부하면서 깨닫는 즐거움을 얻으려면 이해력이 필요한 것이죠.    

  

그런데 이성(理性 reason, logos, Vernunft)의 영역에서 어떤 관점에서는 통찰력은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이성이란 오성이 포함되지 않은 협의로 사용합니다. logos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의 절대적 표준 같은 것은 인간의 오성적 통찰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는 점이 밝혀지기 전까지 수천년간 시도해왔어도 알아내지 못했죠. 아예 그런 것은 없다고 할 정도이니까요. 그뿐인가요? 신의 존재나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죠. 그것을 발견할 통찰력이 인간에게 애초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정신에 범주법칙이나 사유법칙이 입력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언어나 논리가 가능합니다. 그것을 입력한 근원인 창조주의 말씀(logos), 선언, 언명으로만 알 수 있죠. 그리고 그 말을  인간은 이해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어휘들로 선언이 이루어지죠. 창조주가 비추어주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발견자 혹은 전달자가 설명을 통해 일깨워주면 듣는 사람이 동일하게 보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죠. 물론 논문 같은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죠.   

   

그런데 이점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자유의지가 먼저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들으려고 해야하는 것이죠. 편견이나 섭입관, 고정관념에 영향을 받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보지 못하게 즉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죠.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절대적인 통치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아무도 제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권한을 사용하여 의식의 문을 닫고 검토해보지 않아서 생긴 범죄적 무지로 인한 결과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죠. 슬프게도 오늘날 인류의 99% 이상의 절대다수가 그에 속합니다. 이해력이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요. 비유적으로 돼지가 된 것입니다.    

  

이해가 가나요? (아니면 반감이 생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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