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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Jun 10. 2024

대상화

대상화 


어떤 감정에 젖어 있거나 생각에 빠져 있다고 할 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대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철학자는 즉자, 대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어떤 개념을 설명하려 하는 데 그것과 관련이 있으며 어떤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인간에게 자신의 의식 자체를 살피는 의식은 얼마나 믿을 만한 것입니까? 저 자신은 이런 개념의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의식에는 순환의 벽이라는 한계의 법칙이 작용하여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초월을 할 수 없습니다. 즉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실제로 신과 같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한계에 대한 인식은 자가당착,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으므로 긍정법칙에 의해 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식을 살피고 그 질을 높이려는 시도 혹은 노력은 당연히 기울여야 하고 인간 의식에는 그런 기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준 혹은 표준이 있어야 하죠.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자가당착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스스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생명과 그와 관련된 기능을 조금도 만들지 않은 것과 같죠. 어떤 자가당착적인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을 포함하여 만물은 법칙으로 만들어져 있고 인간이 의식적으로 알아야 될 법칙 즉 표준은 창조주에 의해 선언되는 것이죠. 자동적으로 작동되도록 입력이 되거나요. 


그 표준에 의하여 자신의 의식을 살피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죠. 


시편 36편 9절입니다. 

당신에게 생명의 근원이 있으니 당신의 빛으로 우리가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뭔가를 정확히 보려면 생명의 근원에서 나오는 빛과 같은 표준이 필요한 것이죠. 


인간이 나름의 눈으로 보는 것은 마치 어둠 가운데 손으로 더듬는 것과 같아서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일리 있는 면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의견을 적용시키려고 하면 보지 못한 다른 면에 대한 지식을 적용시키지 못한 원인으로 문제를 발생시키기 마련입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어떠한지를 소위 초월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뭘 기준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판사도 판결을 할 때는 법전을 근거로 하는데요. 


그런 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실상 까막눈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명사들의 명상록, 수상록, 어록집에 실린 모든 내용들이 본질상 그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언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러한 것이죠. 심지어 경전이라고 하는 책에 실려 있는 것들도 그러합니다. 일리 있고 그럴듯하거나 기발한 면이 있어도 삶에 적용시켜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인간들이 주제넘게 스스로 그러한 표준을 만들어 보려고 하여 종교의 교주와 같은 입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런 것들이 성공하였다면 이미 수천 년이 지났는데 세상이 지금과 같이 혼란과 혼동 가운데 처하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지성적 근원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으므로 그 근원에서 나온 표준들을 무시해 버리고 오히려 그것을 부당한 억압이라고 간주하고 달리 그에 상응하는 것을 찾으려 해왔지만 그것은 실패라는 것이 확정적으로 증명이 되었을 뿐입니다. 


시편 36편 10절입니다. 

당신을 아는 자들에게 당신의 충성스러운 사랑을, 마음이 올바른 자들에게 당신의 의를 계속 보여 주십시오.


창조주를 아는 즉 인정하는 의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마음이죠. 그래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호의를 얻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자유의지를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에게 그런 약속이 확고히 되어 있죠. 


인간의 자유의지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가장 큰 신성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죠. 아무리 올바른 것이라도 기계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도 누구 혹은 무엇에게 조금의 강요라도 받아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선택한 대로 결과가 임하게 된다는 것은 엄한 창조의 법칙입니다. 99% 이상의, 상대적으로 절대다수가 그 법칙을 거스르는 선택을 한다 해도 그 수치의 비중 때문에 그 법칙의 적용이 조금도 영향받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빛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그 선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더 이상 헤매지 않는 선택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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