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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Jun 12. 2024

시행착오는 필연적인가

시행착오는 필연적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모든 동작들을 정확히 취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작을 번복하게 되는 경우는 숙련가들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오타 한번 없이 타자를 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기 힘든 것입니다. 교정을  전혀 볼 필요가 없게 처음부터 완벽하게 글을 쓰는 문필가도 없을 것입니다. 긴 강연이나 연설일 경우 한 번의 언어 실수 없이, 군말 하나 없이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는 꼭 불완전함의 영향이라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인간은 연습을 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연습을 하거나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정확한 동작을 취하도록 그렇게 관련기능이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죠. 풀어야 되는 문제의 답도 문제를 접하자마자 바로 정답이 떠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성격의 시행착오는 필연적인 면이 있어 어떤 완벽주의자도 그런 점에 대해서 크게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글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실수나 시행착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의 시행착오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면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영적, 도덕적인 면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들은 교육을 받지 않죠. 지와 정서적인 면과 관련해서는 많은 교육을 받아 일찍부터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든지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이죠. 


선에 대한 사랑과 악에 대한 미움, 진리와 거짓에 대한 합당한 애증을 갖도록 훈련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욕하고 때리는 것은 죽어도 하지 말아야 할 악한 것이라는 것을 배우지 않는 것이죠. 그러한 것을 역겹게, 구역질 나게, 혐오스럽게 느끼도록 의식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느낀다면 한 번이라도 그런 행위를 할리가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하죠. 화를 내고 조롱하거나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하고 심지어 때려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훔치거나 빼앗는 것도요. 


그런데 가장 심각한, 죽이는 일조차 나라들 사이에 공식적으로 하죠. 시행착오로써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하고 그것을 잘하도록 훈련도 받는 것이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고 상처를 입히는 정도는 인간으로서 있을 수 있는 시행착오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성격의 것입니다. 성장하면서 한 때 있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과오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없는 것이 마땅합니다.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죽어 마땅함입니다. 물론 인간들은 그렇게 안 해도 죽죠. 어차피 사형수인 면이 있긴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죽을 원인이 심어져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인과법칙은 사실 좋은 면이 그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잘 심어 그 결과를 상쇄 즉 없앨 수 있죠. 영적, 도덕적으로 다시 태아나는 심음을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 참과 거짓에 대한 창조주의 표준을 인정하고 악과 거짓을 미워하고 혐오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것에 유혹을 느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게 할 수 있죠. 악한 충동 자체가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죠. 한 번이라도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죠. (시편 97:10, 아모스 5:15, 잠언 4:23)


잘못 심어 죽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정도보다 새롭게 잘 심어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쉬운 것입니다. 베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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