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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Jul 30. 2024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자연적이건 인공적이건 예술적 대상에는 그 절대적인 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장조주의 정신에, 음악이나 그림 같은 것은 그 창작자의 정신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림은 고정으로 상시로 존재하는 것이고 음악은 연주가나 성악가의 역량에 따라 창작자의 의도가 반영되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죠. 제 생각으로는 등려군 정도라면 그 작곡가가 감사할 정도로 잘 반영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평론가가 그 노래에 반영된 아름다움의 절대치의 일부밖에 느끼지 못하는 청중의 귀의 수준의 안타까움에 대해 피력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나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나 그 감상을 통해 느끼는 행복의 정도는 개인의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다면 모래 씹는 것 같을 수 있죠. 노래도 소음으로 느낄 수 있죠. 


삶의 목적인 행복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염려나 두려움, 스트레스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젖게 되는 이유는 지식부족으로 인한 믿음이 결여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뭔가 해보려다 뜻대로 안 되고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인간은 여러 가지 문제로 많은 짐을 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굴레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돈문제, 건강문제, 사람관계에 있어서의 문제 등등 전전긍긍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지식부족이란 예를 들면 세포의 구조에 반영되어 있는 경이로운 지혜와 사랑을 인식한다면 그 근원인 창조주에 대한 신뢰가 생가고 문제를 그분에게 온전히 맡기는 방식으로 삶을 살게 되죠. 인간이 창조주를 무시하고 자기 뜻에 따라 자기 생각대로 뭘 하려다 처하게 되는 상황은 지천으로 널려져 있는 돈 없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소여에 대해 그것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게 만듭니다. 안타깝죠. 행복에 넘치는 밝고 빛나는 표정의 사람들을 별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표정에는 삶의 우환이나 탐욕이나 따분함 같은 것에 젖어있음이 역력히 나타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사람을 통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람들을 통해 또 그러한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본연의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죠. 불신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부담이죠. 


창조물에 깃들여 있는 지혜와 사랑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간들은 지금과 같은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태(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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