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와 신호
찰학적 사유와 논리적 사고는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우선 그 유래가 의심과 호기심이라는 차이가 있죠. 철학은 필연적으로 거짓을 산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논리는 또 다른 진리에 이르는 수단이며 장치입니다. 논리학은 인문과학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산출하는 결론들은 당연히 유일합니다. 이점도 철학과는 다르죠. 론이 아니라 법칙을 산출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칸트는 철학자라기보다 논리학자이고 그는 뉴턴이 물리에서 여러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논리에서 그러하였죠.
그는 나름의 용어들을 사용하였지만 인간의 정신기능에 관한 성질과 법칙들을 발견하였습니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물리학자가 된 것처럼 그는 위대한 논리학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정신 기능을 이성, 오성, 감성으로 구분하였죠. 지식도 이성적, 오성적, 감성적 지식이 있는 것이죠.
종교나 철학에서 추구해 왔던 영적 진리는 인간이 알아낼 수 없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였죠. 불가지법칙입니다. 아직도 그런 목적으로 철학적 사유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이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리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임어당이 인간은 사유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의 헛됨을 밝힌 것이죠.
이성적 진리, 영적 진리는 창조주에 의해 선언되어 있는 것으로 이를 무시하고 인간이 발견불가한 것이죠. 그런 성격의 사유나 명상은 헛된 노력일 뿐입니다. 절대적으로 그러합니다. 이 점에 무지하여 헛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본상식이 없는 사람들이요. 아직도 종교에 적을 두고 있거나 철학적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요.
사르트르 역시 본질에 관한 진리는 인간이 알 수 없고 실존은 확실하므로 인간은 본질을 알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에 정신적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고 한 것이죠. 소위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모두 칸트가 밝혀낸 법칙을 적용하고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죠.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진 것처럼 개념이 범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칸트가 잘 정리했죠. 칸트는 사유에 관한 법칙들도 정리하였으며 범주나 사유의 법칙이 선험적인 것 즉 창조주에 의해 입력되어 있는 것임도 확립하였죠. 지식이 형성되는 원리인 이성과 경험의 결합에 대해서도 관념법칙으로 확립하였죠.
진리라는 것은 영역이 다른 학문분야와도 시각이나 접근 방법이 다르다 할지라도 본질은 일치하죠.
인간의 뇌, 정신에는 두 가지 신호가 작용한다고 합니다. 형상신호와 현상신호가 그것이죠. 생각신호와 감각신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상신호는 정확히 작용하여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위 "보는 것이 믿는 것"이 되는 것이죠. 관측이 될 수 있어야, 감성으로 확인이 될 수 있어야 진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과학의 두 기둥도 논리와 관측이죠. 과학에서도 그 성격상 관측이 불가한 것은 소설로 여기죠. 태양이 붉고 둥글고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입니다.
빛이 중력 때문에 휘는 것이 관측이 되었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에서 원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관측이 안 되는 것은 거짓이나 소설로 간주되죠. 진화론 같이요. 모든 종교교리와 철학사상은 거짓이 되는 것이죠.
이는 인간의 개인적 감각기관의 성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기만적인 것이라는 점은 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개개인의 시력정도나 색맹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보기에 따라 조명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과 혼동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다르게 보인다는 점도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감각법칙인 것이죠. 감각되어야만 진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성 즉 학문의 영역에서는요.
현상신호는 그렇게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게 작용되도록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망원경으로건 현미경으로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생각신호, 형상신호는 그 정반대로 작용하죠. 자유분방하게 제멋대로 작용하는데 그 원리를 알 수도 없습니다. 양자세계가 불확정성의 지배를 받고 있고 그 현상들을 '요동'이라고 하는 것과 상관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성서의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입니다.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더 믿을 수 없고 무모하다.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의 오성적 즉 학문적 활동인 경우도 이 형상신호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 영역에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죠.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집중해서 연구하고 실험과 검증을 거듭하여 그 결과가 창조신호와 일치하면 겨우 관련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위대한 업적이 되어 노벨상 수상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적으로 뿐 아니라 인문과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수년간 혹은 그 이상의 각고의 노력을 거듭하여 순수이성비판 같은 저서가 나오는 것이죠. 그나마도 개정판이 나오는 것이지요. 관련된 법칙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 생각신호가 창조신호와 일치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논리적 사고의 결과나 신호라는 관련 학문적 시각의 결과나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피조물입니다. 영원히 살아가면서 그 창조의 비밀들을 하나하나 밝혀내는 것이 또한 삶의 보람의 한 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