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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Mar 21. 2022

공감의 본질

공감의 본질    

 

사람들이 지식 혹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는 실제는 ‘다수가 공감하는 의견’에 불과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팩트)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요. 어떤 조사에 의하면 그것의 92%가 편견 즉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진실여부를 엄격하게 따져보지 않고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니 덩달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물론 그런 의견 혹은 주장들이 공감가는 부분이 있기에 받아들여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적인 공감기능이 모든 진실에 대해서 공감을 일으키고 모든 거짓에 대해서 비공감의 반응을 일으킬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실상은 그 반대죠.    

  

그런데 인간에게 공감기능이 있는 이유는 하나법칙의 구현을 통해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원래 인류 전체는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의 몸이죠. 아니 만물 자체가 본시 하나로 얽혀있는 것이란 말도 있습니다. 과학계에서 나온 말이죠. 자신의 가슴이 아프면 자신이 아픈 것이죠. 손이 아파도 그렇고요. 신장병이 있다면 그 사람 자체가 환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한 사람이 아프면 우주에 아픔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자신의 아픔인 것이죠. 누군가가 불의하게 되었다면 우주에 불의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자신의 불의로 느껴야 합니다. 손가락질이나 말질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죠. 자신의 신체의 한 부분에 건강상에 문제가 있다면 예를 들어 피부에 상처가 생겼다면 집중해서 그것을 치료하려 하듯이 문제가 생긴 동료인간에게 동정심과 사랑의 친절을 나타내며 해결될 때까지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죠. 그의 문제에 대해, 그가 처한 곤경에 대해 동정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공감기능의 중요한 한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서 이 하나법칙을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분리적이고 독립적인 가치관을 배우고 자라죠. 대립적인 혹은 배타적인 타인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죠. “남의 일에 신경쓰지 말고 니 일이나 잘 해” 정도가 아니죠. 극단적으로 “한 하늘 아래 너 혹은 너희와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나라를 멸망시키려고도 하는 것이죠.  

    

다른 곳에 끔찍한 재앙이 발생해도 소위 우리에 해당하는 지인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안도하는 것이죠. 담 너머 불구경하듯 하는 것이죠. 그런 가치관을 갖도록 배워왔죠. 대립적 관계에 있는 대상이 피해를 당하면 흐뭇해 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대치 대립국면이며 심지어 가족간에도 그렇습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죠.   

   

태어나서부터 법칙을 거스르는 잘못된 가치관을 배우니 공감기능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같은 말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인물이나 정당이 다르면 공감의 강도나 방향이 판이하게 다르게 되는 것이죠. 진실이 뭐냐 하고는 상관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죠. 어렸을 때부터 의식이 그런 식으로 굳게 틀잡혀져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글을 포함해서 제가 올리는 글들도 많은 분들에게 비공감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공감을 얻자고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법칙을 적용하기 위함이죠. 제가 알아서 유익한 지식들을 통해 동료인간들도 동일한 유익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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