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아래로
자살할 것이 아니라면 바닥이 바위인 100m 높이의 가파른 절벽에서 고의로 뛰어내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뛰어내리라고 강제해서 절벽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그 두려움과 압박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누군가가 그렇게 죽으라고 강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권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의 마음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절벽 근처로 아예 가질 않아서 떨어질까 하는 불안감을 전혀 느끼지 않은 채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상태가 너무 한탄스럽고 삶이 괴로운 나머지 슬픔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이라고 해서 그리 가보았는데 100m 높이의 가파른 절벽으로 보일 때 과연 뛰어내릴 수 있을까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죠. 그렇게 하도록 권한 사람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가 평평하고 먼바다로 나가면 돌아올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어촌이 있는데 연안에서 고기가 안 잡혀 아사 직전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누군가가 먼 바다로 나가도 그런 낭떠러지는 없으며 큰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고 했을 때 시험적으로 먼 바다로 항해해가는 어부의 마음은 어떨까요? 큰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두려움의 본질입니다. 무의식적 차원에서의 두려움이죠. 태어나서부터 사회에서 배워온 것들이 있죠. 공통적인 것도 있고 지역마다 매우 상이한 가치관들을 가지고 있죠.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가치관들이 그것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한국인 공통적인 것과 서로 간에 다른 것들이 있죠. 사안에 따라 동료감을 느꼈다가 적대감을 느꼈다가 하는 것이죠. 대부분 서로 다른 편견일 뿐이죠. 타국의 정치인들끼리도 그렇고 자국의 정치인들끼리도 그렇죠. 제각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거짓과 거짓, 악과 악의 대립인 것이죠. 정치나 종교문제에 대해 대화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 경우가 있죠. 다툴 게 뻔하니까요
그래도 나름 자기 영역에서 틀잡혀 온 사상에 안주하면서 살고 있죠. 그런데 모든 지역에서 극소수의 사람들은 세상의 잘못된 모습들을 보고 한탄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에게 해안에 큰 배가 한 척이 있고 바다 멀리 낙원화 된 신세계로 가는 배인데 그 배에 타라는 권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증거를 보여주면서 실제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멀리 가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낙원 상태의 신대륙의 그림까지 보여주면서 말이죠.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일축할 것입니다. 오히려 허황된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라고 공격하려 할 것입니다. 사회의 암 같은 존재라고 배척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겠죠. 지구가 둥글다고 제시하는 증거를 외면하고 검토 자체를 하지 않으려 하죠.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다른 면에서는 극단적인 이견으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이 면에 있어서는 공통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죠.
혹시 들어본다 하더라도 낭떠러지로 뛰어내리라는 권고를 듣는 것처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죠. 두려움을 ‘의식을 닫게 하는 에너지’, 사랑을 ‘의식을 열게 하는 에너지’로 정의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런 의미의 사랑이 있는지 검토해보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연상되죠. 예수가 전한 좋은 소식과 사람들이 나타냈던 반응에서 생각하게 되는 내용인데 오늘날은 더 절실하고 심각하게 그러한 상황입니다. 그분의 말씀의 주된 적용은 오늘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