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양식
“나는 사람이다”라고 표현하죠. 옳은 표현이죠.
너 형제 몇이야 혹은 형제는 몇이 있습니까? 하고 묻죠. "How many brothers do you have?"라고 할 경우와 같은 뜻이라고 하지만 표현상의 본질적인 차이는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이다 혹은 있다’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have를 쓴다는 것이죠. 이 차이를 한국어로는 존재양식(being mode)적으로 표현하는데 영어로는 소유양식(having mode)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죠. 고대 히브리어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고대언어에는 아예 have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고 합니다.
각각 존재의식과 소유의식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소유의식은 인간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릭프롬의 '소유냐 삶(존재)이냐'라는 책에서 잘 밝히고 있죠.
“돈이나 권력을 소유하려 한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적인 것과 추상적인 대상 모두에 대해 그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현대인의 인간의 의식에 소유양식이 뿌리 깊이 침투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소유의 대상은 몸 밖의 이질적인 것입니다. 돈, 집, 자동차 등등이 다 그러하죠.
만약 그는 지식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지식은 그와는 이질적인 것이 되는 것이죠. 도덕이나 언어 시험을 100점 맞을 정도로 외우고 있는 지식이 있어도 그의 일상언어는 속되고 쌍스럽기 짝이 없고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는 사람이라면 그 지식은 외부의 창고에 있는 물건과 같은 것이죠.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외부의 이질적인 것이 있고 손이나 욕망처럼 신체나 정신의 일부인 것이 있죠. 그래도 '나는 손이다', '나는 욕망이다'와 같이 존재양식적으로는 잘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존재양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 밀접하고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죠.
‘하느님은 사랑’이다 혹은 ‘나는 진리이다, 빛이다’와 같이 존재양식적인 표현은 성서에서는 일반적이죠.
그것은 존재의 속성으로 그의 존재가 그런 것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부분적인 특징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태양이 붉고 둥글다고 할 때 그것이 태양이 한 부분의 특징이 아님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식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그가 지적인 혹은 지성적인 사람이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지식을 진리라고 할 때 '나는 진리'라고 표현하는 경우 진리인 지식과 일치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가르치고 심지어 숨을 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 영혼의 한 속성을 의미하며 그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24시간 내내 그리고 전 인생을 그와 일치하게 사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 표현은 예수에 대해서만 적용하는 것이 옳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요.
외부에 있는 이질적인 소유물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돈이나 집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전혀 쓸모가 없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오히려 부담이나 장애가 되거나 불행이나 재앙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사람을 위해 필수적인 것에 대해서 고대언어에서는 그것을 소유한다고 표현하지 않고 'be to'와 같은 존재양식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 존재의 일부처럼 표현했다고 하죠.
타인, 남이라고 할 때 그것은 외부의 이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 각 개인의 존재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될 때는 존재의 일부 혹은 존재 자체라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은 동료인간이 꼭 필요하죠.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는 하나라고 하죠.
그런 의식이 없으면 동료인간을 필요에 따라 활용하는 도구처럼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의식이 지배적이죠. 동료인간을 자신의 일부처럼 생각한다면 생명을 잃을 위험성이 있는 전쟁에 내보내 죽이게 하고 죽게 하겠습니까? 소모품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그러한 착취의 대상, 도구로 본다는 시각에서 공산주의가 생긴 것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인간을 동무로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사람뿐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을 생산하는 토지 같은 것에 대해서도 "It is to me."와 같이 존재양식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자동차와 같이 외부의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길어지니 본론에 이르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6절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 안에서 빛입니다.
사람을 어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은유적인 표현이기도 할 것입니다. 존재양식적인 표현이라고 하면 의미가 더 심오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둠가운데서는 볼 것이 없죠. 어떤 사람에게 볼 것 즉 배우거나 본받을 점이 없다면 그 사람 자체가 어둠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자신만 행복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고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열심히 경제활동이나 투기적인 행동을 할지 모릅니다. 정치인들도 권력을 추구하면서 그렇게 하여 세상을 훨씬 살기 좋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탐욕이고 정직성과 같은 도덕성이 결여된 생활을 하고 인격이 그렇기 때문에 본받을 것이 전혀 혹은 거의 없는 것이죠. 도리어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본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사실 쾌락을 추구하고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볼 게 있겠습니까? 없죠. 어둠 그 자체입니다. 그에게는 조금의 빛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요. 모두가 어둠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하죠.(마태 5:13,14) 예수 자신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맛을 느끼게 하는 즉 진정한 유익과 즐거움을 주는 그리고 보고 배울 것이 많은 본이 되는 사람이 되라고 한 것이죠. 위의 구절에서처럼 그분의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는 그런 변화가 있었습니다.
존재자체가 변한 것이죠. 위 구절에서도 “여러분은 이 땅의 소금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와 같이 존재양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아직은 그런 식의 존재가 될 기회가 있습니다. 영원하게 될 존재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