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창작
창조라는 것은 그것을 정의하기에 따라 인간이 영원히 할 수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만물의 유일한 창조주는 그 면에 있어서 홀로 영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전적으로 창조한 것이 예수이며 다른 모든 것은 공동 창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생자라고 하는 것이죠. 히브리 1장 3절에는 “그는 하느님의 영광의 반영이자 그분의 본성의 정확한 표상”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되기도 하죠.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6절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를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했을 때 우리란 창조주와 예수인 것이죠. “이렇게 하느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으니,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27)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의 반영이니 아바타를 비롯하여 인간이 어떤 우주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하더라도 나는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저런 모습이 되어야 되겠다고 할 정도로 인간 이상의 이상적인 생김새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꽃들이 아무리 예쁘고 반려동물이 아무리 귀여워도 그런 형태가 되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비약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창조는 아니지만 창조주를 닮아 창작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작을 통해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동료인간에게도 유익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죠.
물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을 전혀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존재하는 것들의 조합일 뿐인데 그것이 엄청난 산출을 하는 것이죠.
한번 더 비약하여......
아무리 경탄을 일으키는 발명품이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원소의 종류는 많아야 수십 종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영어라면 26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죠. 한자라면 수천 정도의 글자이겠지만요.
어떤 곡도 수십 종의 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로 밝혀진 것도 수 십 종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그 무엇도 그 구성요소들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죠.
건반악기의 건반은 수 십 개이지만 기타 줄은 6개에 불과하죠. 관악기의 구멍이나 버튼도 그렇게 많지 않죠. 게다가 인간의 목청은 하나이죠 혀도요. 입술은 두 개이지만요.
그런 것들을 조합하여 무한한 작품들이 창작이 되는 것이죠. 하나의 목청에서 무한히 다양한 소리들이 나오죠.
그런데 무작위적인 조합으로는 무한에 가깝게 반복해도 간단한 창작물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알파벳을 아무리 무작위로 조합해도 간단한 시 한 편 나오지 않습니다. 철 원자들을 무작위로 영원히 결합시켜도 쇠 젓가락 한 짝이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죠.
건반을 무작위로 얼마간 두들기면 산토끼 노래가 정확하게 연주되는 것일까요? 수학적인 계산으로도 무한에 근접합니다. 경년 단위로 그렇게 해보아도 그 정도의 간단한 악보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노래를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이 무작위로 영원히 목청을 진동시키면 산토끼 노래를 한 번이라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개 짖는 소리가 언젠가 한 번은 산토끼 노래가 될 확률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길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진화론적인 주장이죠. 어떤 돌 같은 머리가 있어 그걸 믿는다는 말입니까?
창작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또 그런 유전자가 있다고 해도 창작이란 기본법칙을 거슬러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어로 창작을 하려면 한글 자모를 사용해야 하고 한국어 어법에 맞게 글을 써야 하죠. 아무리 뛰어난 곡이 떠올랐다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악보로 옮겨야죠. 규정된 음표나 쉼표, 기호 등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죠. 나름이 다른 것을 만들어 표현하는 것은 혼란을 일으킬 뿐이죠.
창작은 문학이나 예술 방면에서나 열려 있습니다. 학문 및 산업의 영역에서는 발견, 발명, 개발, 개척, 제조, 생산을 계속하는 것이죠. 둘은 물론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관계이죠. 비행접시도 예술적으로 우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죠.
인간은 사상적인 면, 영적인 면으로도 개념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발전하면서 새로운 용어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죠. 심지어 한 권의 책으로 표현되어야 할 개념을 하나의 단어로 응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양적 질적 발전을 이룩해 가는 것이죠.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은 전혀 아니죠. 인간은 오랫동안 세포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생명을 이루는 단위를 알지 못했죠. 세포라는 단어도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세포학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에 그에 관한 것이 책 한 권 정도로는 안 되는 것이죠. 관련된 용어들도 세기 힘들 정도로 많죠.
새로운 용어들이 만들어진 것은 뭔가 창조되거나 창작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질적 사물에 대해 그러하듯이 영적인 사물에 대해서도 그러하죠.
그런데 인간은 영(靈) 문화에 대해서는 원시적입니다. 기본적인 용어에 대한 이해도 없는 상태이죠.
나름의 영을 지니고 있어 그것이 문학이나 예술에 반영이 되는 것입니다. 선정적이거나 퇴폐적인 것들이 있고 종교나 정치적 이념색이 있는 선전적인 것들이 있으며 독립적이거나 반항적인 혹은 방종적이거나 전투적인, 허무적이거나 신비적인 등등
창작물에 반영되어 인간의 영을 그렇게 틀 잡는데 기여하죠.
창조나 창작, 개발이라고는 결코 할 수 없는 해로운 만들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이념들이고 그 이념들에 기초해서 고안된 정책이나 제도들이죠. 법들이 그렇고요.
그런 것 안에서는 인간이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도 없습니다.
마치 아무렇게나 지르는 소리가 노래가 될 수 없고 귀를 막게 하는 소음이 되는 것처럼 역겨운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무기들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질적으로 수준이 높아지고 양적으로 많아지고 있죠. 결국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인데 인간이 만든 문화, 관습, 전통, 종교, 이념 정책 제도 법 등등이 모두 그러합니다.
관련하여 인간이 창출해 내는 것들은 본질상 무익하고 해로운 것입니다. 정권 재창출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인간의 정권이라는 것은 모두 없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인간은 창작 본성이 있습니다. 유익한 창작을 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법칙을 모르고 당연히 그것을 거스르고 하는 모든 창작물은 해롭습니다. 그걸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