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한 변명들
많은 사람들은 겪고 있는 고통에 상응하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므로 부당하게 느끼고 교직자들에게 질문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대답 중 하나는 하느님도 고통을 겪는데 고통을 겪는 것이 뭐 대수냐는 것입니다. 5세 된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처럼 끔찍한 죽음을 당하느냐고 질문하면 하느님이 어린 천사가 필요하여 데려간 것이다 와 같이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수장에게 그 이유를 질문하면 뭐 부부끼리도 싸우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유가 있어 나라들끼리 싸우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죠.
정치인들의, 비난받는 이슈에 대한 대답이 얼마나 궁색한 것인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부정적이고 불미스럽고 불법적이고 악한 현상이나 행위들에 대해 오히려 그것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설명이나 변명들은 넘쳐흐르고 있죠.
오히려 인정하고 자책할 이유가 없고 모른다고 정칙하고 겸허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세속의 가치관입니다. 인정하면 상대가 더 큰 공세로 나오고 더 큰 압박을 받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죠.
신뢰할 만한 인격을 갖지 못한 존재들에게 정직하고 겸손하고 사려 깊고 양보하는 태도를 나타낼 필요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이죠. 자신이 옳고 정당하다고 끝까지 밀어붙여야 된다는 태도를 서로 간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 무신적이고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인 가치관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유신론자라는 종교인들은 더 교묘하게 그런 주장을 합니다. 이만저만이 아닌 그런 무지막지한 억지를 부리는 것이죠. 교리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은 정치계나 종교계나 궁색하기 짝이 없는 억지 변명들을 매우 강하고 거칠게 주장하며 죽을지언정 그런 태도를 변화하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그러합니다. 서로 간에 그런 줄 알고 있죠. 그래서 서로 죽이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죠.
세상이 전체적으로 공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