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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Oct 26. 2024

가장 유능한 무지

가장 지혜롭고 신성한 무지

가장 유능한 무지      


가장 지혜롭고 신성한 무지      


하느님에 대한 한 정의는 “전지, 전능, 영원, 무한, 최고, 절대,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전지라는 표현은 성서에 나오지 않으며 전능(사다이)은 철학적인 의미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히브리어 ‘사다이’는 ‘대적을 철저히 멸망시키는’ 혹은 ‘자신의 백성은 온전히 구출하거나 보호하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 신학적으로 혹은 공상적으로 부여한 관념과는 많이 다르죠.     

  

여호와는 창조주이므로 만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지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 즉 자유의지를 부여한 대상의 미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는 면에서 ‘전지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미리 안다’는 ‘하느님’과 호응할 수 없습니다. ‘모양은 빠르다’ 와 같이 호응이 안 되는 주술관계인 것이죠. 만물은 그분이 하기에 달린 것이므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죠. 마치 침대의 향방을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할 때 자기 방의 침대가 내일 이 시간에는 어디 있을까 하고 호기심을 갖거나 예측을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이지 많으면 그 자리에 있고 옮기면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만약 로봇처럼 프로그램해놓은 것이라면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것이라 태양이나 지구의 위치처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면 인격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자신은 그렇게 프로그램된 존재가 물론 아니지요.      


창조라는 것은 인간이 쉽게 알아낼 수 있게 그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자나 광자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상보적으로 입자와 파동, 물질과 에너지로서의 성질을 중첩하여 지니고 있다고 하죠. 위치와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죠.     

 

공간도 단지 3차원이 아니라 10차원 혹은 11차원이라고 하는 데 그래야 세계가 지금처럼 운행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인간이 알아낼 수 없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알아낸 것이 고작해야 ‘불확정’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다는 것의 한계 때문에 알아낸다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죠. 또 논리적으로도 감성으로 확인이 안 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소위 ‘물자체’라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인간의 의식이나 신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전적으로 만들었으면서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은 것이죠. 또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지도 않고 알 수도 없어야 만물이 지금처럼 운행될 수 있으며 인간에게도 자유, 자유의지라는 것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전지전능한 신이 프로그램 해 놓은 대로 즉 예정해 놓은 대로 진행된다는 그런 예정론 혹은 운명론에 따른 전지전능보다 이 ‘불화정’이 비교도 안 되게 더 큰 능력과 지혜가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성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라 할 수 있죠.      


불확정을 무지와 연관 짓는다면 우주에서 가장 유능한 무지인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무지이며 가장 신성한 무지이죠.     

 

인간은 이런 면에서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죠. 어떤 미치광스러운 것이라도요. 사실은 인간들은 공식적으로 미치광스러운 행동들을 하고 있죠. 파괴하고 죽이는 극단적인 행동을 제지받지 않고 하고 있죠. 국가적인 차원에서요. 신은 없어 보일 정도로 간섭 없음을 온전히 느끼면서요.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조금도 신이 예정한 바가 아닙니다. 신이 그것을 알았다느니 몰랐다느니 하는 표현 자체는 문장으로서도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모순되게도 유물론, 진화론, 무신론과 같은 철학들은 죽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데 지금처럼 살다가 죽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어마어마한 지혜로, 만들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심리, 논리, 과학과도 상충됩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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