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데
사람들은 거짓과 악과 추함과 더러움에 매우 익숙해져 있고 깊이 중독되어 있습니다.
늙음은 사실상 큰 악함이고 끔찍스러운 저주이며 역겨운 추함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극단적으로 역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억지로 미화하려 해도 그것은 거짓입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기에 억지로라도 그 부정적인 측면을 외면하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주스럽게도 20대부터 노화가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양로원을 방문하는 10대들은 그곳이 마치 무덤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너 저런 할머니 하고 결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래 하고 질문하면 차라리 죽고 말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던 젊은이들도 이내 거울에서 쭈그러진 피부의 끔찍한 얼굴을 보며 절망의 한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어 없어진 지 이미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세상은 온갖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게 감각을 마비시키는 독가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늙음의 억울함, 부조리함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왜? 하는 의문을 강렬하게 일으키지 않도록 말이죠.
세상에는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들도 많죠. 잠시 실아 있는 동안 그런 것에 넋을 잃고 생로병사의 시름을 잊거나 불만스러운 점이 있으면 마음껏 투덜대며 욕을 퍼부어 스트레스를 풀면서 세상의 영이 하라는 대로 살다가 소멸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사야 65:20입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 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인간에게 노쇠와 죽음 자체가 극히 비정상적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저주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과법칙이란 자신이 심지 않은 것에 대한 결과를 거두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성유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심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16~18입니다.
땅에서 스스로를 축복하는 사람은 믿음의 하느님을 두고 스스로를 축복하고, 땅에서 맹세의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음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실제로 이전의 고난이 잊혀지고 내 눈에서 감추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인하여 영원히 환희에 넘쳐 기뻐하여라.
새로 심는다는 것은 창조주의 약속으로 스스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늙음이라는 고통이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창조주의 마련으로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고요.
나는 영원한 건강과 젊음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스스로 축복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