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동기와 한계
이 글의 제목에는 분석, 동기, 한계와 같은 개념들이 사용됩니다. ‘의’와 ‘와’도요. 8개의 형태소, 5개의 단어, 세 개의 어절로 구성되어 있죠. 적어도 수십 개의 형태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8개의 음절, 17개의 음소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분석은 이 글을 쓰는 취지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순수하게 언어학적인 것이라면 그런 측면에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죠.
위 단락의 첫 문장인 “이 글의 제목에는 분석, 동기, 한계와 같은 개념들이 사용됩니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려고 하면 더 분량이 많아지고 그렇게 한 것에 대해 또 그렇게 한다면 무의미한 무한에 빠지게 됩니다.
분석적이고 본질적인 분석이나 해석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선택적 사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역사학이란 과거의 좋지 않은 일들, 경험들에 대해 본질적으로 분석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것일지 모르지만 유익한 것이 전혀 아닐 수 있습니다.
소위 인문사회과학의 많은 분야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무수한 상충되는 주장만 산출될 뿐인 것이죠.
개인적으로 다양할 수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이란 전혀 무가치한 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논쟁 즉 다툼만 불러일으킬 뿐이죠. 세상은 그런 다툼으로 혼란 그 자체입니다.
동물의 신체를 분석 즉 분해해 보면 개체, 기관계, 기관, 조직, 세포 그리고 세포를 분해해 보면 핵이나 미토콘드리아 등 각종 세포 내 물질들이 있고 핵에는 염체제가 있고 T, A, C, G의 네 가지 분자의 복잡한 결합들로 되어 있고 각 분자들은 몇몇 원자들의 복잡한 결합으로 되어 있고 원자들은 전자, 중성자, 양성자 등으로 그것들은 또다시 쿼크나 다른 소립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죠.
그런데 이런 식의 분석에서 인간들은 대단히 유익하고 실용성이 있는 정보들을 찾아냅니다. 개인적인 다름이란 있을 수 없으며 국제적으로 통일된 결과를 산출합니다. 각종 기기를 만들어 내는 원리들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매우 해롭고 동기적으로도 매우 사악한 해석에 대한 것입니다.
해석할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닌데 훨씬 복합하고 모호한 말로 억지스러운 해석을 하려 하여 그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죠,
바로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말씀이란 대개 간명한 언어로 되어 있어 그것이 최종결론이며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이다.”
뜻풀이가 필요한 어려운 말이 전혀 아니지요. 그런데 성서의 이런 식의 많은 표현들에 대해 왜 그것을 해석하여 결론을 그 언명과 다른 것으로 유도하려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언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이미 그들이 결론을 내려 그것으로 세력을 구축한 다른 이론, 교리와 다르기 때문이죠. 즉 성부하느님, 성자하느님, 성령하느님과 같이 삼위 즉 세 개의 인격이 있다는 것이죠. 위의 말씀과 상충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느님’이라든지 ‘하나’라는 개념에 대해 철학적으로 억지스러운 개념을 도입하여 그 의미를 변질하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들이 모호하고 그리고 매우 복잡한 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은 죽는다, (에스겔 18:4)”는 표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영혼 불멸은 기독교의 주요 교리인데 성서에 그런 사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철학적인 말로 그 의미를 와전시키는 억지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물론 해석이 필요한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공식적으로 많은 살인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해왔죠. 그러므로 여기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 하면서 철학적인 말로 의미를 변화시키려는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숭배에 아무런 형상을 만들거나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의미가 전혀 어려운 것인 아니지요. 그러나 십자가상이나 마리아상등을 만들어 널리 사용합니다. 예수나 마리아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하는 데 물론 말씀에 전혀 근거가 없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해석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죠. 평신도가 성서를 보지 못하게 했던 시절에는 반발이 없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교리가 성서와 왜 이렇게 다른 거야?” 하는 반발을 누그러트리려면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해석하려면 성서를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것을 최종적인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수십억에 달한다는 기독교인들은 단정적으로 말씀과 일치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당연히 행하지도 않죠. 교리 자체의 90%가 그리스 철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을 발휘하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찔러 영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가르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분별해 냅니다.”—히브리서 4:12,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징계하는 데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전히 유능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게 해 줍니다.(디모데 후 3:16,17)
인간들은 자신의 온갖 그릇된 생각이나 악한 행동들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변화시키는 스트레스를 겪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하다는 정죄를 받기도 싫죠. 그러므로 간명하고 건전한 원칙들에 대해 소위 철학적 해석이라는 것을 사용하여 그것을 피하려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들은 사악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