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통
인간의 고통은 본래적인 것입니다. 그 자체는 비정상적이거나 이상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신체에는 머리카락이나 손발톱 같은 것을 제외하고 통각세포가 산재에 있는 것입니다.
신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고통을 느껴야 대책을 세우게 되죠. 자각증세가 없는 어떤 병들은 치료 불능상태가 되어서야 발견되어 시한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의사도 도울 수 없죠.
그런데 어차피 의사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서글픈 현실입니다.
고통을 쉽고 강하게 느끼는 예리하고 섬세한 민감성은 틀림없이 유익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베드로 후서 2장 8절입니다.
그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살면서 보고 듣는 불법 행위 때문에 그의 의로운 영혼에 날마다 심한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동료인간의 불법을 인식하는 것은 큰 고통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이 법은 자연의 법, 창조이 법이라고 이해될 수 있지만 정치판을 보면 인간이 만든 법에 대해서도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법관도 그것에 고착하지 않는 것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는 것을 볼 수 있죠. 그런 꼴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이죠.
고통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민감성을 스스로 둔화시킨 사람도 많은 것이죠. 고통이 싫거든요. 스스로 양심의 작용을 멈추게 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야 불법하게 이득이나 쾌락을 취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스스로 사형수라 생각하고 시한부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면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의 쾌락을 누리는 것을 선택하게 되죠. 죄책감이라는 고통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선택이 되는 것이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에스겔 9장 4절입니다.
도시 안에서 저질러지는 모든 혐오스러운 일 때문에 한숨짓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여라.”
그러나 신음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5~7절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듣는 데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뒤에서 도시 가운데로 두루 다니면서 쳐라. 너희 눈이 가엾게 여기지도 말고, 동정심을 느끼지도 마라. 너희는 노인과 청년과 처녀와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다 죽여 없애야 한다. 그러나 누구든 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가지 마라. 나의 신성한 곳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이 그 집 앞에 있던 장로들부터 치기 시작했다. 그분이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집을 더럽히고 모든 뜰을 살해된 자들로 가득 채워라. 가거라!” 그러자 그들이 나가서 그 도시 안에서 사람들을 쳐 죽였다.
신음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는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 불가능하게 자신을 훈련시킨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통은 행복의 반대이고 삶의 반대일 수 있어 피하고 싶겠지만 그래서 스스로 양심기능을 불에 짖어 무감각하게 하였을지 모르지만 (디모데 전 4:2) 그런 삶의 결말은 위의 경고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무시하는 법을 터득하였습니다. 한 때느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정신병자 또는 반사회적 인물에게서 볼 수 있는 기본적 결함이다.”이라고 한 적이 있지만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어떤 고통을 예리하게 느끼지 사람인지 살펴보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