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동료인간을 경멸적으로 강하게 비난하는 것은 실제로 그가 그럴만한 일을 한 경우에도 주제넘은 것일 수 있습니다. 죄를 주궁하는 검사나 형을 선고하는 판사도 그렇게는 하지 않죠.
마치 죽일 듯이 궁지에 몰아넣고 궁박을 하는 경우도 있죠. 단지 미안해거나 부끄러워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크게 서운해하거나 치욕스럽게 느끼거나 반감을 갖거나 원한을 느끼게 하여 심지어 복수심에 불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렇게 하는 이면에는 전혀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지각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둔하고 죄의식이나 도덕감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어 보통말로 주의를 주거나 경고를 하는 경우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죽일 듯이 몰아쳐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상 부득이하여 겉으로는 인정하는 척하여도 실제로는 지각이 둔하여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그 순간에는요. 오히려 너는 얼마나 깨끗하고 의롭기에 이렇게 다그치는 것이냐고 원망할 수도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동료인간이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그를 진정으로 위하는 동기에서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확신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강한 징책은 그만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그가 언젠가는 잘못을 진정으로 깨닫고 크게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상황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래서 그렇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로 몰아칠 기세를 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출애굽 20:19)
대부분의 인간들은 성정이 심각하게 불완전해져서 예리한 도덕적 감각이 결여된 언행을 하면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법상의 죄를 짓고서도 어떻게 하면 벌을 줄이거나 피할까 하는 데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죠.
인간들은 대개 그러하며 극소수만 정상적인 도덕적 감각을 지니고 있죠. 주변에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수 십 년이 지나서라도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으로 심각할 정도로 부실한 상태를 깨달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확률상 0.1% 정도입니다.
그 당시는 도무지 깨닫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그처럼 강하게 자신을 징책해 준 그 사람을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하면서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그가 큰 애정을 자신에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요.
인간은 대개 이처럼 어리석고 둔합니다. 나중에라도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일 정도로요.
어떤 역한 현상을 접할 때 그 이면의 어떤 진실을 간파하는 통찰력은 희귀한 것입니다.
인간은 극한상황, 한계상황이라는 국면에 처해있다고 말하는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의를 갈망하는 사람은 그러한 희귀한 통찰력이라는 것을 필히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