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우리는 여러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여러분에게 써 보냅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것들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후 1:13)
그러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아래의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인들은 눈에 보입니다. 그들이 활동이나 그들의 집무를 보는 건물들도 눈에 보이죠. 지금은 세계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눈에 보이게 전달됩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여호와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영의 기본적인 의미는 “보이지(감각되지) 않지만 보이는(감각되는) 현상을 낳는 것”이죠.
“나는 믿음을 나타냈다. 그래서 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음을 나타내고 그래서 말합니다.(고후 4:13)
믿음은 보이지 않죠. 그러나 믿음의 표현인 언행은 보이게 나타나죠. 믿음도 일종의 영인 것이죠.
윗 구절에서 자유를 산출하고 구현하는 것은 여호와의 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자신에 관한 영광스러운 지식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능력이 하느님의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고후 4:6,7)
어둠 속에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죠. 그리스도를 통해 지식의 빛을 비추었는데 그 보물과 같은 것이 불완전한 인간의 몸에 주어졌다는 것이죠. 불완전한 인간의 언행을 통해 그 빛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구사한다든지 장애를 즉각적으로 치료한다든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발휘될 수는 없죠. 그 근원이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기적이나 전해지는 소식을 보거나 들어도 깨닫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그들 가운데서 이 세상 제도의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을 눈멀게 하여, 하느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에 관한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의 빛이 비치지 못하게 해 왔습니다.(고후 4:4)
그 원인이 위와 같이 설명되죠.
사람들은 어둠가운데 헤매는 노예와 같죠. 정신의 눈이 멀어 육안으로 보이는 정치인들을 좇아 그들을 인도자로 삼아 희망을 두고 있죠. 그 언행이 매우 극성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들은 자유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정치적 이념이나 정치인들을 노예주로 하고 있는 노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곧 늙어 병들어 죽죠. 멸성의 종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영, 창조주의 영이 없으므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위의 구절들은 2,000년 전의 사람들도 이해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와 같은 영적인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죠.
이해한 사람들은 이미 빛 가운데 가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고 있죠.